러시아, 첨단산업 합작에 돈 댈테니 한국은 기술 달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4면

대덕단지 방문한 러시아 나노기술공사 추바이스 사장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국유재산 사유화와 시장경제 개혁을 이끈 아나톨리 추바이스(53·사진) ‘로스나노(나노기술공사)’ 사장이 5~8일 한국을 방문했다. 1990년대 초부터 부총리 등 국가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최근 로스나노 사장에 임명됐다. 7일 오전 대덕연구단지를 방문하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가는 그를 차 안에서 약 2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그는 “양국 합작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금은 상당 부분 러시아가 부담할 수 있다”며 “한국은 앞선 기술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

-로스나노는 어떤 회사인가.

“2007년 자본금 50억 달러를 투자해 세워진 100% 국영회사다. 나노 기술을 응용해 사업화하기 위해 설립됐다. 나노 기술 관련 원천 연구는 소련 시절부터 핵 물리학으로 유명한 쿠르차토프 연구소가 주로 맡는다. 로스나노는 이를 상업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로스나노 설립 이유는.

“러시아는 90년대 혼란기를 극복하고 시장 경제를 위한 기초를 다졌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7~8%대를 이어가고 있고, 재정·무역 수지도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이 같은 긍정적 거시 경제 지표 위에서 지속적 성장을 위한 새로운 동력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러시아 경제는 대부분 석유·가스 등 지하자원 수출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이제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산업에 기초한 혁신적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로스나노가 세워졌다.”

-한국을 찾은 목적은 무엇인가.

“협력 파트너를 찾는 것이 첫째 목적이다. 한국 기업들이 협력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하길 기대한다.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는 러시아가 75%까지 책임질 생각이 있다. 러시아에 더 중요한 건 한국의 발달된 기술이다. 올해 12월 3~5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나노기술포럼에 한국 업체의 많은 참여를 기대한다. 이와 함께 한국이 첨단 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킨 비결을 살피는 것도 방문 목적 가운데 하나다.”

- 당신이 주도한 90년대 시장경제 개혁의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나.

“사유화만 본다면 개혁의 기본 목표는 성공적으로 이뤄졌다고 본다. 당시 많은 전문가가 국유 재산의 전면적 사유화는 몹시 위험하며 실현될 수 없는 과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개혁의 결과 러시아에 사유 재산이 나타났다. 물론 실수도 많았다. 투자펀드를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국민에게 나누어준 민영화 수표인 ‘바우처’를 사 모아 투자를 하는 중개회사였다. 400개의 투자펀드가 만들어져 4000만 장의 바우처를 사 모았는데 결국 모두가 파산했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시장경제가 막 도입되던 90년대 초반의 러시아에서 투자펀드와 같은 금융기관은 절대로 기능할 수가 없었다.”

- 국제 금융위기를 어떻게 보나.

“현 상황이 20~30년대 세계 대공황 이후 최대의 위기라는 데 대해선 누구도 이견이 없다. 앞으로도 대형 금융회사들의 도산과 같은 극적인 사건들이 더 터질 수 있다. 그리고 금융의 문제가 실물경제로도 번질 것이다. 내 생각에 아직 바닥까지 간 것은 아니다. 이번 사태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에서 시작됐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경제시스템 전반의 개편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현재의 시스템은 제2차 세계대전 뒤 미국이 세계 경제를 주도할 때 만들어졌다. 40년대 미국은 세계 경제의 50%를 차지했지만 현재 미국의 몫은 25%밖에 안 된다. 지금은 어느 한 나라가 세계를 경영할 수 없다.”

-이번 경제 위기의 여파로 러시아에서 국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던 98년과 같은 사태는 없겠나.

“그때와 지금 상황은 크게 다르다. 98년 러시아의 대외채무는 1500억 달러였지만 지금은 500억 달러밖에 안 된다. 당시 30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액은 지금 5500억 달러나 된다. 당시 국제유가는 배럴당 8달러 선이었지만 지금은 80달러 선이다. 러시아는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있다.”

유철종 기자

◆아나톨리 추바이스=90년대 초·중반 보리스 옐친 대통령 아래에서 부총리·대통령행정실장·재무장관 등을 지낸 정치 엘리트이자 경제 전문 관료로 ‘사유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98년부터 10년 넘게 국영 전력회사 사장을 지냈고, 올 9월부터는 러시아가 새로운 경제성장 동력으로 키우고 있는 첨단산업 분야 국영기업인 로스나노의 사장을 맡고 있다. 미국 3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의 국제고문이기도 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