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분야 한국의 앞선 기술 제공해 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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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시장경제 개혁을 이끈 ‘사유화의 아버지’ 아나톨리 추바이스(53ㆍ사진)가 5~8일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1990년대 초ㆍ중반 보리스 옐친 대통령 아래에서 부총리ㆍ대통령행정실장ㆍ재무장관 등을 지낸 엘리트 정치인이자 전문 경제 관료다. 98년부터 올해 중반까지 10년 넘게 국영전력회사인 ‘통합에너지시스템(UES)’ 사장을 지냈다. 올 9월부터는 러시아가 새로운 경제성장 동력으로 전략적으로 키우고 있는 ‘로스나노(나노기술공사)’의 사장을 맡고 있다.

이번 방한 목적도 최근 나노기술 분야에서 한ㆍ러 협력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미국 3대 은행인 JP 모건체이스의 국제고문이기도 하다. 7일 오전 대덕연구단지 내 나노종합팹센터(NNFC),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등을 방문하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가는 그를 차 안에서 약 2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그는 “합작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금의 상당부분을 러시아가 부담할 생각”이라며 “한국은 앞선 기술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음은 인터뷰 일문일답.

- 로스나노는 어떤 회사인가.

“2007년 자본금 50억 달러를 투자해 세운 100% 국영회사다. 나노 기술을 응용해 사업화 하기 위한 회사다. 나노 기술 관련 연구는 소련 시절부터 핵 물리학으로 유명한 쿠르차토프 연구소가 주로 맡고 로스나노는 이를 상업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 로스나노를 설립한 이유는 무엇인가.

“러시아는 1990년대의 아주 힘든 혼란기를 극복하고 이제 시장 경제를 위한 기초를 다졌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7~8%의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고 외환보유액은 5500억 달러나 된다. 재정과 무역 수지도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이 같은 긍정적 거시 경제 지표 위에서 지속적 성장을 위한 새로운 동력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러시아 경제는 대부분 석유, 가스 등 지하자원 수출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산업에 기초한 혁신적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 2년 전 이 같은 필요성을 인식한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대통령(현 총리)가 나노 산업 육성을 지시하면서 로스나로가 설립됐다. 다행히 러시아는 소련 시절부터 물려 받은 튼튼한 기초과학과 세계적 수준의 교육 시스템이 있다.”

- 방한 목적은 무엇인가.

“로스나노를 한국에 알리고 협력 파트너를 찾는 것이 첫째 목적이다. 둘째는 한국이 첨단 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킨 비결을 살펴보는 데 있다. 한국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협력 프로젝트에 참여하길 기대한다. 프로젝트 투자비는 러시아가 75%까지 부담할 생각이 있다. 러시아에 중요한 것은 한국의 앞선 기술이다. 한국 기술과 러시아 기술을 접목하는 것도 가능하다. 러시아 연방 정부 차원에서도 적극 지원할 것이다. 12월 3~5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나노기술포럼에 한국 업체들의 많은 참여를 기대한다.”

- 최근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로스나노와 한국의 교육과학기술부 사이에 상호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가 체결됐다.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협력이 가능하다고 보나.

“MOU를 통해 양국은 나노 기술 분야에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기로 합의했다. 이는 앞으로의 협력 사업을 위한 기반을 놓은 것으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아직은 검토 단계지만 반도체, 전자, 바이오 기술 등의 분야에서 협력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 당신은 로스나노 회장이 되기 전 러시아 국영전력회사인 통합에너지시스템(UES. 우리의 한국전력에 해당. 올해 7월 20여 개 독립 민간 기업으로 분리됐다)에서 오랫동안 회장으로 일했다. 당시 러시아 극동의 잉여전력을 북한으로 수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 이것은 아주 흥미 있는 프로젝트다. 이 계획은 여전히 유효하며 계속 추진되고 있다. UES에서 독립한 극동의 ‘동부 에너지 시스템’이란 회사가 이 프로젝트를 이어 갈 것이다.”

- 당신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시장경제화를 이끈 주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유화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스스로 개혁의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나.

“시장 경제로의 개혁은 아주 어려운 조건 속에서 진행됐다. 하지만 개혁의 기본 목표는 이루어졌다. 사유화만 본다면 기본 목표는 성공적으로 달성했다고 본다. 당시 많은 전문가들이 국유 재산의 전면적 사유화는 몹시 위험하며 실현될 수 없는 과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개혁의 결과 러시아에 사유재산이 나타났다. 물론 실수도 많았다. 투자펀드를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국민에게 나누어준 민영화 수표인 ‘바우처’를 사모아 투자하는 중개회사였다. 당시 러시아 국민은 사유재산이 뭔지, 그것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등과 같은 기본적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중개회사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것이 실수였다. 400개의 투자펀드가 만들어져 4000만 장의 바우처를 사모았는데 결국 모두가 파산했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시장 경제가 막 도입되던 90년대 초반의 러시아에서 투자펀드와 같은 금융기관은 절대로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이 같은 배경을 설명하려 했지만 국민이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바우처를 날려 버린 4000만의 투자자들로부터 “추바이스는 러시아를 말아먹은 국민의 적”이란 욕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 90년대 중반 상트 페테르부르크 부시장에서 물러나 놀고 있던 푸틴을 당시 대통령 행정실장(비서실장)이던 당신이 크렘린으로 불러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어낸 얘기다. 물론 우리는 가까운 사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정부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모스크바로 올라 온 상황은 알려진 것과 다르다. 실제로 내가 일자리 하나를 추천했는데 푸틴은 그것과 상관없는 다른 일자리를 찾았다.”

- 당신은 항상 자유 시장경제 원칙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통치한 기간 동안 경제부문에서 국가의 역할이 크게 늘어났고 많은 민간기업이 국유화됐다. 새로운 국영 기업들도 많이 생겨났다. 이것은 시장 경제의 원칙에서 후퇴한 것이 아닌가.

“그러한 비판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동의한다. 국가의 개입, 국영 기업의 출현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보겠다. 2005년 국영가스회사 가스프롬이 로만 아브라모비치(영국 축구구단 첼시를 소유한 러시아 최대 재벌)로부터 민간 석유회사 ‘시스네프티’를 130억 달러나 주고 매입한 것은 잘못이다. 국유화 이후 이 회사의 생산성이 오르지도 않았고, 석유 채굴량도 늘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국가가 경제발전에 쓸 수 있는 엄청난 돈을 낭비한 것이다. 반대로 국가가 개입해 성공한 사례도 있다. 최근 국제 금융위기로 투자 은행들이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러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정부는 민간투자은행들에 대한 자금 지원에 나섰다. 미국의 사례에서 보듯 한 투자은행이 파산하면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국가의 개입은 올바른 조치다.”

- 현재의 국제 금융 위기가 아주 심각하다고 보나. 이 같은 위기 상황은 얼마나 지속될까.

“1920~30년대 세계 대공황 이후 최대의 위기라는데 대해선 이견이 없다. 위기가 아직 끝났다고 볼 수 없다. 앞으로 대형 금융기관들의 도산과 같은 극적인 사건들이 더 터질 수도 있다. 그리고 금융의 문제가 실물 경제로 번질 것이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서 경기 침체 불가피하다. 내 생각에 아직 바닥까지 간 것은 아니다. 이번 사태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면 위기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 시작됐지만 좀더 근본적으로는 국제금융경제시스템 전반의 개편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현재의 시스템은 제2차 세계대전 뒤 미국과 유럽이 세계 경제를 주도할 때 만들어졌다.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금융 시스템인 브래튼우드 체제가 만들어진 것도 그때다. 이 시스템은 당시에는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냉전 종식과 공산주의 붕괴 이후 미국은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승리했고 미국이 가장 강력한 국가라고 믿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실수였다. 지금은 어느 한 나라가 세계를 경영할 수 없다. 40년대 미국은 세계 경제의 50%를 차지했지만 지금 미국의 몫은 25% 밖에 안된다. 미국 뿐 아니라 중국ㆍ인도ㆍ브라질ㆍ러시아ㆍ한국 등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국가들이 있다. 국제 금융경제 시스템의 개편이 필요한 때가 된 것이다.”

- 이번 경제 위기가 러시아에 미칠 영향은. 국가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던 98년과 같은 상황은 없겠나.

“러시아도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올해 러시아의 GDP 성장률을 7.7%에서 7% 이하로 내려 잡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경제가 붕괴 위기에 처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98년과 지금 상황은 크게 다르다. 98년 러시아의 대외 채무는 1500억 달러였지만 지금은 500억 달러 밖에 안된다. 당시 30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환 보유액은 지금 5500억 달러나 된다. 당시 국제 유가는 배럴당 8달러 선이었지만 지금은 100달러를 넘어섰다. 러시아는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있다.”

- 올 9월 미국 3대 은행인 JP 모건의 고문이 됐는데.

“국제고문직이다. 실제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국무장관,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 등도 고문으로 있다. 선진국 대표들이 다 들어갔는데 러시아도 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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