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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의 영화 VS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VS 인 더 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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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면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똑똑해지는 여자들을 바라보는 일은 즐겁다. 그들은 몸과 마음이 진정 원하는 것에 새롭게 눈뜨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세상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속박하는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분투하며 세상의 이웃들에게 눈을 돌린다.

최근 이혼 뉴스로 화제가 된 한 여자 코미디언 역시 그런 '똑똑해져가는 여자'임에 틀림없다.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코미디언이 된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뒤 콘서트 코미디라는 새로운 시도를 성공시켰고, 다른 한편으론 여성과 소외받은 자에 눈뜨며 그들의 앞잡이가 되는데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의 이혼은 가슴 아프지만, 세상의 모순에 눈뜬 그가 가정의 울타리 안의 불합리를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모순을 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 여자 코미디언과 비슷한 시기인 1980년대 초에 데뷔하고, 그 여자가 쓰리랑 부부로 전성기를 맞았던 80년대 말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로 일약 전세계 남성의 연인으로 자리잡은 여배우가 멕 라이언이다. 이 여자의 신작 '인 더 컷'은 그동안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이미지의 배우 멕 라이언에서 자신이 보이고 싶은 멕 라이언의 모습을 관객 앞에 당당하게 던져 놓는 작품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그 여자는 어느날 하늘에서 내려온 로맨틱 코미디의 여신처럼 보였다. 반쯤 내리깐 눈과 한껏 치켜올린 턱과 코끝으로 자존심을 드러내며 "파이는 절대 데우지 말고 아이스크림은 위에 얹지 말고 따로 주시며…"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알고 있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당당하게 주장할 줄 알며, 원하는 남자에게는 거짓 오르가슴을 완벽하게 해 보일 수 있을 정도로 남자를 아는 '여우'.

그녀는 스스로가 연기한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해 아웅다웅하면서도 결국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해피엔딩으로 안착하면서 남자의 안온한 품으로 달려가 안기며 완성되는 사랑의 환상을 쌓아 올렸고 우리로 하여금 같이 꿈꾸게 만들었다. 그 여자가 양쪽 입 꼬리를 살짝 들어올리며 반달 눈을 만들어 그 사랑에 만족해 할 때 여자들은 그것이 사랑에 빠진 여인이 만들어내는 표정의 정답임을 의심치 않았고, 양눈썹 사이 주름조차도 귀엽게 찡그리며 가짜 오르가슴을 연기할 때 관객들은 남녀 관계에 필요악으로 존재하는 위선의 중요함을 깨달았으며, 심지어 엉엉 울 때 일그러지는 입 모양까지 귀엽게 만들어야 그와의 의도치 않았던 멋진 하룻밤이 선뜻 닥친다는 진리를 전파했다.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 속의 그녀의 모습을 너무 사랑했던 관객들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도어스, 프루프 오브 라이프 등 정통 드라마와 액션으로 훨훨 날아오르고 싶었지만 번번이 로맨틱 코미디라는 둥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스스로에게 주입된 이미지와 환상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거대해졌다.

그러나 반 로맨틱하고 안티 코믹한 스릴러 '인 더 컷'에서 이 여자는 아이스크림이나 칵테일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구체적으로 아는 것보다 자신의 몸이 원하는 욕망의 세계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며, 입으로만 내는 가짜 오르가슴의 소리보다 몸속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신음소리가 정말로 소중하며, 크리넥스로 닦아내지 않고 흘러내린 채 내버려둬 콧물과 뒤범벅이 된 눈물이 더 아름다우며, 센트럴 파크의 울긋불긋한 낙엽더미와 스타벅스와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더라도 어둠침침하고 음습한 이스트빌리지의 낡은 아파트에서도 사랑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연쇄살인범일지도 모르는 새 연인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사랑의 환상에 빠졌던 엄마의 다리가 잘려나가는 악몽을 꾸면서 끊임없이 사랑의 위대함에 회의한다.

이 여자의 나이 마흔하나. 이제 콜라겐과 보톡스의 도움없이는 입 꼬리는 더 이상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가지 않고 미간의 귀엽던 한 줄 주름은 수많은 주름 속에 묻혀버렸지만, 날것 그대로의 자신의 욕망에 눈뜨고 그것을 원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이제 '옆집의 귀여운 처녀'나 '아메리칸 스윗하트' 세계와의 결별을 당당히 선언한다.

이 여자의 이런 변신엔 분명 자신의 실제 생활이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다. 알코올 중독으로 부모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데니스 퀘이드와 결혼한 순정파였던 그는 88년 해리.샐리 이후 90년대까지 행복한 연예인 커플과 로맨틱 코미디의 공주로 미국인들의 영원한 연인이라는 이미지 속에서 안락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2000년 '프루프 오브 라이프'에서 공연한 러셀 크로와 스캔들이 터지며 타블로이드 신문들을 즐겁게 만든 그는 결국 이 스캔들로 이혼한 뒤 잇따른 실패작 끝에 제인 캠피온 감독에게 스스로 오디션을 자청하며 니콜 키드먼이 포기한 이 역할을 따낸 것이다. 그런 결심이 있었기에 멕 라이언은 이전 작품들에서 그토록 바랐지만 이뤄지지 않았던 변신에 성공해, 자신을 옭아매던 헛똑똑이 이미지의 새장에서 벗어나 진정한 현명함의 세계로 훨훨 날아 오른다.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여성, 똑똑해지려고 하는 여성은 언제나 아름답다.

이윤정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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