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희의 푸드플러스] 보리밥과 강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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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면 보릿고개로 접어들죠? 지금이야 쌀이 귀하지 않으니 보릿고개란 말도 아련한 추억 속의 단어가 돼버렸네요.

건강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쌀밥보다는 보리밥이, 아니면 현미밥.잡곡밥이 인기죠. 그러나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아니 대학 다닐 때도 그랬으니 80년 대 중반이랍니다) 정말 웬만한 시골 부농이라도 5월이면 으레 밥에 쌀보다는 보리의 비율이 많았답니다.

저희 어머니도 이맘 때가 되면 광에 들어 있는 벼의 분량을 아버지께 물으셨고, 남은 벼 분량에 따라 밥의 색깔이 점점 검게 변해 갔답니다. 옛날 시골의 주 수입원은 쌀을 팔거나 야채를 재배해 팔거나 동물을 길러 파는 거였거든요. 그러니 쌀이 귀할 수밖에요.

특히 여름에 생일이 몰려 있는 저희 집(식구 11명 가운데 6명)으로서는 생일날도 모두다 쌀밥을 먹는 게 아니라 생일 주인공과 할아버지.할머니만 쌀밥을 먹고 나머지는 역시 보리밥을 먹었거든요. 어머니가 어찌나 기술적으로 밥을 지으시는지 쌀밥과 보리밥이 경계선이 완벽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할머니, 생일인 주인공 밥을 푼 다음에는 보리밥과의 경계선이 무너지면서 보리밥으로 변하는 거죠. 늘 찬장 속에는 시커먼 보리쌀 삶은 것이 한 소쿠리씩 들어 있었어요. 어린 제 눈에는 보기만 해도 밥맛이 떨어지는 그런 빛깔이었거든요.

그리고 할아버지.할머니는 늘 이밥(쌀밥)은 싱겁다고 말씀하셨어요. 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여우의 신포도'라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저도 지금은 쌀밥이 싱겁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됐네요.

이런 꽁보리밥이 요즘은 꽤 비싼 메뉴에 올라 있더군요. 아예 건강 별식으로요.

어머니는 보릿고개가 시작되면 자주 만드시는 음식이 또 한가지 있으셨는데요. 바로 강된장이에요. 된장에 갖은 양념을 해 만드셨는데 그 당시 쇠고기는 특별한 날 아니면 구하기 힘들었으니 쇠고기 대신 보리새우 말린 것을 넣으셨어요. 그리고 밥을 짓는 가마솥에 넣어 찌셨어요. 가지나물이나 호박잎을 찔 때도요. 밥이 우르르 끓어오르면 가마솥 뚜껑을 한번 열었다 닫아야 계속 넘치는 것을 막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보리밥은 물을 좀 넉넉히 부어야 보리쌀이 부드럽게 퍼지기 때문이죠. 그 때가 바로 뚝배기에 준비해 놓은 강된장을 밥솥에 넣는 적절한 타임이랍니다.

강된장을 밥솥에 넣어 찌시고는 밥을 풀 때가 되면 강된장을 먼저 꺼내 뚝배기 바깥쪽에 묻은 밥알을 떼시고는 아끼시는 석유 곤로에 얹고 아주 약한 불로 보글보글 한소끔 끓이셨어요. 너무 센 불에서 끓이면 된장 맛이 거칠다고 하셨어요. 된장 양념을 할 때는 꿀을 약간 넣어야 된장의 떫은맛을 없앨 수 있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이렇게 강된장을 끓이시는 날엔 구수한 열무김치가 밥상에 오르거나 아니면 텃밭에서 갓 벤 연한 부추나 깻잎이 등장했어요. 어머니는 부추나 깻잎을 씻어 물기를 털어내고 새끼손가락 마디 길이로 송송 썰었어요. 숟가락으로 뜰 때 늘어지지 않는 길이지요. 그리고 고추도 송송 썰고 마늘도 얇게 저며서는 깊이가 깊지 않은 소쿠리에 풍성하게 담아 상에 올리면 원하는 만큼씩 덜어갔답니다. 보리밥 위에 얹고 들기름을 약간 끼얹은 다음 강된장을 떠 넣고 쓱쓱 비비면 군침이 절로 넘어갔답니다. 그 싫어하던 보리밥 생각은 까맣게 잊고요. 여기에 오이지 무친 것이라도 있으면 씹히는 맛이 또 일품이었어요.

요즘 보리를 재배하는 농가가 없어 우리 보리쌀이 흔치 않다는 얘길 들었는데요. 이 계절이 가기 전에 보리쌀 한 봉지 사다가 밥 지어 강된장 끓이고 야채 얹어 비빔밥 한 번 만들어 보세요. 추억과 함께 말이에요.

노영희 푸드스타일리스트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 보리밥 짓기

▶재료(4인분)=흰쌀 1컵, 보리쌀 불린 것 2컵, 물 3컵, 참기름이나 들기름 약간

▶곁들임 야채=부추 150g, 깻잎 20장, 풋고추 4개, 마늘 4쪽

▶만드는 법=보리쌀은 씻어서 하룻밤 물에 담가 불린다. 쌀은 씻어 체에 쏟아 30분 정도 둔다. 밥솥에 보리쌀을 밑에 깔고 위에 쌀을 얹은 다음 물을 부어 밥을 짓는다. 부추와 깻잎은 깨끗하게 다듬어 씻고, 물기를 털고 각각 1~2cm 길이로 썬다. 풋고추는 송송 썰고 마늘은 얇게 저민다. 밥이 다 지어지면 밥에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섞어 그릇에 담고 함께 비벼 먹을 야채를 담아 곁들인다.

*** 강된장 끓이기

▶재료=된장 1컵(꿀 1큰술, 마늘 다진 것 1큰술, 파 다진 것 1큰술, 참기름 1/2큰술), 쇠고기 100g(설탕 1작은술, 참기름 1작은술, 후춧가루 약간), 풋고추 2개, 홍고추 2개, 생표고버섯 2개, 물 1/4컵

▶만드는 법=된장에 꿀과 마늘 다진 것, 파 다진 것, 참기름을 넣고 섞어 양념한다. 쇠고기는 굵게 다져 설탕과 참기름, 후춧가루를 넣고 무친다. 풋고추와 홍고추는 길이로 갈라 씨를 긁어내고 가로.세로 5㎜ 크기로 썬다. 표고버섯은 흐르는 물에 씻어 기둥을 떼고 마른 면 보자기에 싸서 살짝 눌러 물기를 걷어낸 다음 가로.세로 5㎜ 크기로 썬다. 뚝배기에 된장 3분의 1을 깔고 위에 쇠고기와 고추, 표고버섯 반을 켜켜로 얹는다. 다시 된장 3분의 1을 깔고 쇠고기와 고추, 버섯을 얹은 뒤 나머지 된장으로 위를 평평하게 덮는다. 된장 그릇에 물을 부어 그릇을 부셔 뚝배기에 살짝 붓고 김이 오른 찜통에 얹어 15분 정도 찐 뒤 중간 불에 올려 한소끔 끓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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