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뒷걸음치는 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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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한달간의 정부.여당의 움직임을 보면 정권 초기의 서슬퍼렇던 개혁의지나 정책기조는 이제 「무(無)」로 돌리고 과거로 원대복귀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정부는 지난 8.15에 자신의 상표라할 사정(司正)의 최대 수확물인 대형 비리사건의 주역들을 모두 사면.복권시켜 주었다.이어 내년 방위비 증가율을 권위주의시대 때의 그것에 육박하는 12%수준으로 대폭 높였다.
한총련사태가 빚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억제했던 경찰의인력을 증원하고 시위진압 장비도 크게 보강하기로 했다.뿐만 아니라 지난 93년에 여.야 합의로 제한했던 대공(對共) 수사권을 과거 수준으로 회복하기로 당의 방침을 결정했 다.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경제 부문에도 있다.새로운 노사개혁을 추진하는가 했더니 이즈막에는 근로자에게만 부담을 지우는 임금동결이니,감원이니 하는 기업들의 움직임을 방관하거나 부추기고있는듯한 기미도 보여주고 있다.뿐만 아니다.언제 는 세계화를 부르짖더니 이제는 해외여행을 흰 눈으로 흘겨보지를 않나,느닷없이 지난 날의 미니스커트 단속을 연상시키는 과다노출 단속에 나서질 않나,청소년 통금제 도입을 검토하지 않나,아무튼 총체적으로 우리 사회의 시계 바늘들을 모조리 뒤로 돌리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게다가 정부는 국민이 궁금해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큰 각도로 정책전환을 하면서도 제대로 해명이나 설명도 않고 있다.
모두 사면.복권시켜줄 것이었다면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사정은 왜했으며 국민의 비난을 무릅쓰면서 사면.복권한 이 유는 무엇인가.모든 국민이 궁금해하는데도 상세한 설명도 없고 설득하려 애쓰지도 않았다.
방위비 12%증액이나 대공 수사권강화,경찰예산증액등은 하나 하나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이다.가령 방위비만 해도 방위비가 우리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추어 볼때1%포인트만 늘리거나 줄여도 나라살림의 내용과 틀이 크게 달라진다.다른 나라 같으면 이런 결정은 선거때 공약으로 내걸어 국민의 의사를 확인한 다음에 한다.
우리의 경우 바로 다섯달전에 총선이 있었다.바로 요 다섯달새에 안보정세가 달라진 것은 아닐테고 방위비 증액요인이 쭉 잠재해 있었다면 총선때 국민의사를 물어보는게 순리였을 것이다.예산책정이란 우선 순위의 다툼이요,일종의 제로섬 게임 이다.방위비를 늘리는 것이 필요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늘리면 복지나 환경등에는 주름살이 가는 부분이 생겨나게 마련이다.그렇다면 국민에게 물어보는게 좋지 않은가.
최소한 예산책정때 상세한 설명이라도 있어야 할텐데 『한반도를둘러싼 정세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군의 사기진작과 방위력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간단한 언급이 고작이었다.경찰예산증액에 대해서도 『최근 한총련집회 대처과정에서 보았듯이 경찰 이 인력과 장비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정도의 설명으로 끝이었다.대공 수사권강화건 역시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여론 수렴 과정을 거치지 않은채 제기되었다.
중요한 문제들을 공론을 모으는 과정도,사후의 상세한 설명도 없이 정부여당 혼자서 제기하고 혼자서 결정해 추진해버리는 것이다. 도대체 이 시점에서 정부의 국가경영철학은 무엇이며 지금 이 사회를 어디로 끌고 가려고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자고 나니세상이 달라져 있다는 식으로 최근 정부 출범 초기의 기조와는 크게 다른 크고 작은 정책들이 마구 쏟아졌다.그러면 지난 날의정책기조는 잘못되었다고 판단을 내린 것인가.정부는 이 점만이라도 분명히 해주어야 할 것이다.
정권이 제1차적으로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정체성(正體性)부터명확히 하는 일이다.불과 반년전만 해도 아무 말이 없다가 돌연상황이 달라졌다며 변전(變轉)을 하면 반년뒤에는 또 어떤 변전을 할는지 몰라 사회가 불안하게 된다.
물론 상황과 여건이 달라지는데 따라 정책에 변화를 줄 수도 있고 때로는 그 기조에도 변화가 올 수 있다.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공론을 모으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정책변화는 그런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그것조차 없 으니 당혹스럽기만 하다.정부는 우선 국민에게 겸손하기나 하라고 요구하고 싶다.아울러 세상이 과연 바뀌었냐고 묻고 싶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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