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말잔치로 끝난 '삶의 質'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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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해 12월말,세계화추진위 산하 국민복지기획단의 1차 보고서가 나오고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공청회가 열렸다.대통령이「삶의 질」을 강조하고 만든 작품이라 정부나 국민의 기대가 꽤컸었다.사회복지계의 학자.현장전문가,그리고 정 부 각부처 관계자 등 50여명이 10개월 가까이 연구에 몰두해 준비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공청회가 진행되자 엉뚱한 얘기가 튀어나왔다.기획단의 한 멤버이자 그날 토론자로 참가한 재경원의 모 고위관리가『사실 향후 2~3년간은 복지에 투자할 재원이 없을 겁니다.교육투자가 더 급하니까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그는 그리고 『2~3년후에는 꼭 복지투자가 이뤄질 것』이라고 다소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 모였던 3백50여명은 모두들 대통령의 특명으로 준비된 삶의 질의 「보랏빛」청사진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궁금해했던것이 사실이다.최근 보건복지부의 한 담당과장은 그 기획단의 보고서가 문민정부 들어서서 처음으로 만든 「한국의 베버리지 리포트」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당시 이 보고서에 대해 사회복지계에선 처음부터 의구심이 적지 않았다.바로 96년도부터 늘어나는 각종 복지시책에 대한 예산계획이 전혀 붙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예산계획 문구란 그저 『복지예산을 향후 2010년까지 매년 정부 일반회계 증가율의 1.2배씩으로 늘린다』는 총괄적이고 선언적인 것이 고작이었다.그날 재경원 당국자의 대답과 미안해하는 표정도 바로 『예산은 어떻게 되느냐』하는 사회복지계의 질문공세에 대한 답이었다. 그날 이미 예견됐던 일이었다.아니나 다를까.내년도 정부의 예산편성에서 사회복지예산이 형편없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노령수당 지급대상을 70세에서 65세이상으로 확대하고 생보자(生保者)자녀 교육비 지원을 생보 고교생 전원에게 확대하 겠다는 등의 계획이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이러다간 정부 전체의 일반회계증가율(평균 13.5%)의 1.2배는 커녕 최소 1배의 같은 수준조차 어려울 판이다.
그런 연구작업을 무엇 때문에 했나.지난해 3월 대통령이 코펜하겐 유엔 사회개발정상회의 (WSSD)에 다녀온 뒤 21세기 「삶의 질」 선언과 함께 시작된 연구작업이다.그 야심찬 청사진이 시행 첫해부터 무참히 깨져버리는 것을 보니 허탈 감을 금할수 없다.
공청회에서 이미 모습을 보였지만 재경원에는 국민복지기획단의 10개월간 연구과정이나 보고서가 그저 「남의 일」이었다.향후 2~3년간 복지투자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면 연구과정에서 계획연도를 그때부터 시작하자고 주장했어야 옳았다.공 청회 자리에서 미안해할 일이 아니었다.주무부인 보건복지부도 문제다.힘이 없다고 예산문제를 슬그머니 뒤로 감출 일이 아니었다.
내년도 사회복지에 대한 정부투자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낮게 편성 됐을까.경기침체와 긴축예산,또 교육투자 우선을 들어 사회복지투자를 잠시 보류한다 해도 정부일반회계 증가율조차 못따라가는 예산편성을 했을 때는 그만한 논리가 있었을 것 이다.
혹 그 논리가 사회복지에 대한 정부투자를 자원봉사나 모금 등민간복지로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었으면 한다.성장과 복지가 꼭 경합(trade-off)관계가 아니듯 민간복지와 정부복지 역시 경합이 본질이 아니다.그 둘은 오히려 함께 가는 파트너십 관계여야 한다.정부는 팔짱을 낀 상태에서 그저 국민들의호주머니와 자원봉사에 모든 것을 기대하겠다고 한다면 결코 복지사회가 이뤄질 수 없다.
실업.빈곤.의료.주택문제를 비롯,노인.장애인.아동.여성문제등우리사회에 산적한 사회문제 해결에 정부가 보다 적극적이어야 한다.정부내 예산당국자도 안 보는 「한국의 베버리지 리포트」와 그 리포트를 비웃듯 시행 첫해부터 잘려나가는 복 지예산.이것이현 정부의 사회복지 시각이 아니길 빈다.
(자원봉사사무국전문위원)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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