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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地圖>24.영화-신인감독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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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최근들어 영화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대기업들이 자동차1백만대를 팔아야 벌수 있는 돈을 영화 한편으로 거머쥔 『주라기공원』의 신화에 도취된듯 앞다퉈 영화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이제 영화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예술장르며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식되고 있다.영화란 과연 무엇이며 한국영화는 지금 어디로 질주하고 있는가.96년 한국영화의 문화적 지형을 더듬어 보고 바람직한 대안을 모색해보는 기획시리즈 「문화지도-영화」를 시작한다.
[편집자 註] 「감독병」이라는 난치병이 있다.가을만 되면 도진다는 「신춘문예병」,동창회만 다녀오면 재발한다는 「고시병」과증세가 비슷하지만 치료기간이 더 긴게 특징이다.유일한 치료법은성공적으로 영화감독이 되는 것.
감독이 되려면 긴 세월을 음지에서 기다려야 한다.올해 국산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한 『은행나무 침대』의 강제규감독은 7년간의 시나리오작가 생활 끝에 메가폰을 잡았다.『개같은 날의 오후』의 이민용감독은 경제적으로 실업상태나 다름없는 연출부 일을 7년 하고도 작품준비하는데 또 그만한 시간을 보냈다.이렇게 기회를 잡기 어려운 감독 지망생들에게 지난해는 절호의 기회였다.
제작된 영화 64편중 4분의1 정도가 데뷔작이었다.올해에는 이런 분위기가 더욱 고조돼 현재 진행중 인 30여편중 20편 정도가 처녀작이다.
올봄 언론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이 기현상을 두고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란 표현을 자주 썼다.참신한 신인들이 들어와작품의 경향이 다양해지고 제작도 활기차다는 것이다.그러나 신인감독의 군집은 한국영화의 가능성과 함께 구조적 취약성도 드러내고 있다.
가능성은 이런 것이다.8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영화 열풍으로 저변이 넓어지고 고급인력이 몰리고 있다는 것.그래서 웬만한중견감독보다 참신한 감각의 신인에 베팅하는 제작자가 속속 나오면서 새로운 감각을 수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 장미빛 미래의 이면에는 커다란 함정이 있다.데뷔작중 신인의 창의력과 패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은 몇 안된다.대부분 성공한 기존 작품의 흥행요소를 짜깁기한 안전지원이다.
『코르셋』의 정병각감독은 다이어트 열풍.여성주의와 충무로식 코미디 문법을 시의적절하게 섞어 일단 흥행의 합격선을 넘었다.
『돈을 갖고 튀어라』의 김상진감독은 스승인 강우석감독의 코미디감각을 답습해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이 두 감독은 그래도 다음 작품의 제작자를 쉽게 만날 수 있어 행복한 경우다.
문제는 일단 자기 스타일을 제쳐놓고 흥행문법을 버무린 영화로데뷔전을 치렀는데 실패한 신인들.이 경우는 흥행부진 이유가 연출력 부족으로 귀결돼 다시 기회를 잡기 어렵다.
절반이 넘는 신인들이 이 길을 걷는다.지난해와 올해 데뷔전을치른 감독중 다음 작품을 잡은 타율은 형편없이 낮다.데뷔 기회는 쉽게 오지만 거기서 실패하면 「일수불퇴」요 「낙장불입」이다.손쉬운 데뷔는 그만큼 1회용으로 소모될 위험부 담도 감수해야하는 것이다.
많은 신인들이 이 함정에 빠지는 이유는 『일단 무난하게 데뷔하고 나서 내 스타일을 부리겠다』는 전략 때문이다.이 말은 본의 아닌 거짓말이 되기 십상이다.결과는 자기 스타일을 찾을 기회도 없이 묻혀버리든지,데뷔작과 비슷한 흥행영화를 포장만 바꿔내놓을 공산이 크다.
***『비명도시』 재능 못살려 지난해 『닥터봉』으로 흥행1위를 기록한 이광훈감독은 한국시장에서 흥행성이 강한 로맨틱 코미디를 첫 작품으로 잡았다.일부 평론가는 영상의 세련미를 들어 유사영화들과의 변별성을 강조했지만 미국까지 가서 공부하고 와 충무로 흥행문법의 답습이냐는 실망도 많았다.현재 제작중인 『패자부활전』도 연출에서 변수가 많지만 기획안의 기본틀은 『닥터봉』과 유사하다.
김성수감독은 밀어붙이면 승산이 있을 법했는데 안전지원이 오히려 화근이 됐다.단편영화 『비명도시』를 본 사람은 누구나 그의재능을 인정한다.『런 어웨이』는 『비명도시』의 모티프를 장편영화로 확대하려한 작품인데 자신의 스타일은 자취를 감추고 할리우드 액션문법이 거칠게 튀어나온다.결과는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의쓴맛. 『내일로 흐르는 강』의 박재호감독은 대조되는 체험을 했다.90년 『자유부인』으로 완전한 실패를 맛보고 영화판을 떠났던 그는 『영원히 영화를 그만 두더라도 내식대로 한번 해보자』는 오기가 생겨 지난해 『내일로…』을 만들었다.들고나온 소재는흥행의 사약이며 사회적 금기인 동성애.그런데도 『내일로…』은 비평적 호평 덕분에 그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었다.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그러나 열악한 여건에서도 처음부터 자기 노선대로 밀어붙여 성공한 경우는 심심찮게 ■ 다.홍상수.임순례.강제규.이민용감독이 그 대표적 사례.
***홍상수.임순례 新作호평 해외 유학파인 홍상수.임순례감독의 노선은 저예산 방식으로 비평적 호응을 얻으며 5만~7만명 정도의 고정관객을 꾸준히 동원하는 것.7억원을 들인 홍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촬영기간 내내 스태프들이 『도대체무슨 영화를 만 드는 거야』라고 의아해할 정도로 자신의 새로운스타일을 고집했다.추석 직후 『세 친구』를 내놓을 여성감독 임순례도 4억원의 제작비로 개성있는 작품을 내놓아 주목을 끌고 있다. 이 둘에게서 눈여겨 볼 점은 대자본인 동아수출공사와 삼성을 제작에 참여시켰다는 것이다.연출력만 뒷받침되고 저예산이면제작자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홍감독은 4만명을 동원한 감독으론 드물게 시나리오도 없는 상태에서 『꽃잎』의 제작 사 미라신코리아와 다음 작품을 계약했다.
강제규.이민용감독은 충무로 현장에 오래 몸담은 경험을 살려 기존의 흥행문법을 자신들의 스타일로 한층 세련시켜 흥행에도 성공하고,어느 정도 비평적 평가도 받았다.신인감독 누구나가 노리는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그러나 『유리』의 양윤호감독은철저히 절반의 성공에 만족해야 했다.그는 관념적인 박상륭원작의『죽음의 한 연구』를 영상으로 옮겨 놓을 결심을 했다.하지만 제작자를 못찾아 3억원의 빚을 냈다.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는등 비평적 성과가 있었지만 흥 행엔 참패했다.그는 신인의 패기를 보여줬지만 현실 여건과 자신의 노선을 조화시키는 과제를안고 있다.
영화평론가 이정하씨는 현재의 한국영화계를 『인적 자원은 꾸준히 축적되고 있지만 자본의 조급성 때문에 활용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상태』라고 지적한다.
상업적 기획이 흥행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독창적 스타일을 고집한다고 늘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격심한 지각변동을 겪고 있는 오리무중의 한국영화계에서 신인이 재능을 발휘하려면 눈앞의 흥행논리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몸에 맞는 입구를 찾아야한다.그 입구는 타인의 눈엔 보이지 않는다.
남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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