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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100년 전 한성, 주인공은 놀이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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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카메라 셔터 앞에 포즈를 취한 2008년판'은세계'배우들. 그들의 엄숙한 표정이 100년 전 광대들의 치열함을 떠올리게 한다. [정동극장 제공]

2008년은 한국 연극 100주년의 해라고 한다. 왜? 국내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가 1908년 문을 열었고, 또 같은 해 이인직의 신소설 『은세계』를 원작으로 한 최초의 신연극 ‘은세계’가 공연됐기 때문이다. 이를 기념해 연극 ‘은세계’가 무대화된다. 이쯤되면 대략 예측이 가능해진다. 둘 중 하나다. 최초의 신연극 ‘은세계’를 충실히 복원해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든가, 아니면 현대적으로 싹 바꾸고 ‘고전의 재해석’이란 타이틀을 달든가. 그런데 막상 개막을 앞둔 연극은 이도저도 아니다. 구한말을 그대로 재현하는가 싶더니 원작에 없던 내용이 대폭 추가돼 오히려 원형은 볼품없어진 모양새다. 거기서 멈췄으면 또 그러려니 했다. 끝으로 갈수록 남 얘기 같지 않게 가슴팍을 콕콕 찌른다. 2008년 판 ‘은세계’(사진)를 올리는 작가 배삼식은 절묘하게 관객의 목덜미를 잡을 요량이다.

# 왕관의 주인공은 광대

지난달 29일 서울 정동극장. 극단 미추 배우들을 중심으로 런스루(마치 실제 공연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연습하는 것)가 진행됐다. 공연은 마치 판소리 한마당을 방불케 했다. 아니리·자진모리·중모리 등 온갖 장단에 맞춘 구수한 창(唱)에 절절함과 아련함이 배어나왔다. 창극 형식을 띤 ‘은세계’의 원형을 살리기 위해서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국립창극단 소속 왕기석, 여성국극단원 김성예씨 등이 수혈됐다.

작품은 극중극 형태다. 작가 이인직이 무대에 등장한다. 역사상 이인직은 ‘은세계’가 실제로 공연되는 걸 보지 못한 채 일본으로 떠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과 같은 이인직의 대사는 충격적이다. “친일파? 내가 바란 것은 그 정도가 아냐. 난 완벽한 일본인이 되고 싶었어. 매국노? 나한테는 팔아넘길 만한 나라가 없었어.” 한국 연극 시초의 숨기고 싶은 속살을 작품은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래도 방점은 이인직이 아닌 ‘은세계’를 실제로 만들어간 광대들에게 찍힌다. 허금파·강소향·박팔봉·최금돌 등 이름 또한 정겹다. 입에 쩍쩍 붙는 그들의 사설을 듣고 있다 보면 100여 년 전 한성의 외진 변두리가 그대로 옮겨온 듯 생생하다. 손진책 연출가는 “이인직에게만 쏠린 과도한 시선을 덜어내고, ‘은세계’를 무대에 구현하고자 힘겹게 씨름해 온 이름 없는 놀이꾼들이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당시 광대들의 고민은 무엇일까. 연출자에 해당하는 강참봉은 “경극에 왜놈들 신파, 곰재주, 활동사진…. 구경거리는 차고 넘치는 디 조선 구경거리는 눈을 씻고 봐도 없네. 국창(國唱) 소리를 들었으면 이름값을 해야 헐 것 아녀?”라고 자조한다. 허금파는 “요즘 시속이 소리보다 인물을 더 쳐주고, 듣는 것보다는 보여 줘야 좋아들 하니까…”라며 한탄한다. 새로움에 대한 강박,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과 대중이 원하는 것 사이의 줄타기 등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인다.

조금씩 뼈대를 갖춰가던 공연은 조 대감의 등장과 함께 출렁거린다. 그는 광대들의 후원자다. 작품 올리는 것을 중단하라고 한다. 일종의 압력이다. 그런데 이유가 얼토당토않은 것도 아니다. “이인직이란 작자가 이완용 비서로 한성 동경을 오가면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왜놈들을 등에 업구 득세한 개화파 놈들이 과거에 청국에 붙어먹던 자들한테 한풀이하자는 거 아녀.”

이 지점에 배삼식 작가의 의도가 스며 있다. 외부 혹은 상층부의 부당한 압력, 그것에 홀연히 맞서고 싶으나 그 결과는 오히려 더 악한 세력에 이용당할 뿐이다. 무엇이 옳은지, 어느 길이 바른 것인지, 그 앞이 불투명한 현재의 한국 사회와 교묘하게 중첩된다. 그렇다면 작품에서 광대들의 최종 선택은? 그건 어쩌면 갈팡질팡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100년 전 조상들의 살아 있는 육성일지도 모른다.

3일부터 정동극장. 02-751-1500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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