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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10. 연희대 입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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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외교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연희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직후 찍은 사진.

 당시 경동중은 3대 공립으로 졸업생 거의 전원이 상급학교에 들어갔다. 우리 때도 서울대 공대 23명, 법대 20명, 문리대 15명과 연희대(현 연세대) 20명, 고려대 20명이 합격했다. 졸업 때 내 성적은 문과 117명 중 9등이었다. 1등은 민병남, 2등은 최호중, 3등은 이계철이었다. 나는 과목별 성적 편차가 심했다. 영어는 월등히 뛰어났지만 수학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싸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면서 5등 하는 게 1등보다 낫다는 생각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정치과냐, 고려대 정치과 또는 법대냐를 고민하고 있을 때 이원익이라는 친구가 “연희대에 정치외교과가 생겼는데 외교관이 되려면 거기로 가는 게 어떠냐”고 조언했다. 이원익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잘하는 수재였다.

그 때는 대학에 가서 입학 원서를 받아야 했다. 연희대에 갔더니 울창한 숲이 열리면서 언더우드 박사 동상과 담쟁이가 뒤덮인 돌집이 나타났다. 잔디밭에는 여학생들이 앉아 있고 음악소리도 들렸다. “여기다”라며 결정했다. 이원익과 나는 함께 합격했다. 이원익은 6·25 때 군대에 가지 않고 시골에서 영어선생을 했는데 폭음을 하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6·25로 인생이 바뀐 사람이 너무 많았다.

1949년 당시 연희대 등록금은 8만5000원으로 이화여대 5만원, 서울대·고려대 3만3000원보다 훨씬 비쌌다. 당시 총장은 백낙준 박사였고,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인 원한경 박사가 명예총장이었다. 학도호국단장은 장순덕, 호국단 감찰대장이 박갑득(박갑철 아이스하키협회장의 형), 감찰대 부대장은 나중에 소공동파 두목으로 재판을 받은 홍영철이었다.

연희대에서는 매주 월·수·금요일 한 시간씩 노천극장에서 예배를 봤다. 나는 그 예배시간을 잊지 못한다. 가끔 유명 인사들이 와서 강연을 했는데 그 중에는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 세계적인 신학자 에밀 브루너도 있었다.

그해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부터 본격적으로 외교관 시험 준비를 했다. 밥 먹는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 자는 시간 등 4~5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공부만 했다. 외교관 시험은 고등고시 행정3부로 헌법·행정법·국제법·영어와 선택 과목 하나를 치러야 했다. 영어는 자신 있었기에 그만큼 유리했다.

원서 마감일인 50년 6월 20일, 지금의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코너에 있던 고시위원회에 원서를 제출했다. 행정3부는 8월 4일부터 12일까지 본고시를 치게 돼 있었다.

그런데 원서를 제출한 지 5일 만에 6·25가 터진 것이다. 혼란은 날로 심해졌다. 27일 학교 측이 학생 전원을 노천극장에 소집했다. 서울이 함락되던 날 아침이었다. 수색 쪽으로 군인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김원경 총장서리가 국가위기사태로 휴교한다는 선언을 했다. 그리고 결사대를 모집했는데 2명이 신청했다. 그때 비장했던 느낌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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