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프리즘>가수 인순이-지내온 여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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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이 무언지 압니다.』 가수 인순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으레 「혼혈인」의 멍에 때문에 힘들었던 그의지난 날을 함께 떠올린다.하지만 「열린 음악회」의 스타로 다시태어난 그에게 그러한 과거는 아련한 기억속에나 남아있는 삶의 잔해일 뿐이다.지난 57년 진 해에 주둔하던 미 해군장교인 아버지와 24세 꽃다운 나이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세살되던 해 아버지와 헤어졌다.복무기간을 마치고 귀임한 아버지의 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어머니를 어린 그는 원망했다.하지만 13세되던 해 『불쌍한 어머니를 원망하지 말자.이젠 아버지의 빈 자리를 잊자』고 굳은 결심을 했다.
힘들었던 중.고교생 시절 그를 지탱해준 힘은 「펄벅재단」이었다.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도움을 주는 이 재단과의 인연은 이때시작됐다.
인생의 무게를 노래에 실어 덜어왔던 그는 포천여종고를 졸업하던 지난 78년,아는 사람의 소개로 당시 미8군 무대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한백희씨를 만나 가요계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된다.
서울로 올라와 여성3인조「희자매」를 조직해 『실버 들』이란 곡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다.
1년반만에 솔로로 독립한 그는 『떠나야할 그 사람』『슬픔만 남아있어요』『밤이면 밤마다』를 연속적으로 성공시키며 어엿한 자신의 자리를 구축해간다.
84년은 그에게 「가수」로서의 기쁨과 「혼혈인」으로서의 아픔이 교차한 한 해였다.그해 가요계에서는 『아,대한민국』을 필두로 한 건전가요가 전국을 강타했다.평소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온 그는 박문영씨로부터 받은 『아름다운 우 리나라』란 곡으로 또 한번의 성공을 거두지만 일부에서 『네 나라가 어떻게한국이냐』는 질시가 쏟아지고 한동안 잊었던 「혼혈인」이란 상처로 인해 다시 괴로움을 겪게된다.그렇지만 전국 각지에서 쏟아지는 더 큰 성원으로 위기를 넘기고 핏 줄의 고통을 완전히 떨쳐내는 계기가 됐다.
이후 「인순이와 리듬터치」란 댄스그룹을 조직해 김완선.이주노(「서태지와 아이들」전 멤버)등이 가요계에 진입하는 계기를 만들어줬고 『눈물의 편지』『착한 여자』등을 히트시키며 자신의 위상을 다져나갔다.어려운 이들과 가족만 보면서 달려 오던중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지난 92년 타고가던 차가 전복되는 사고에서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됐다.이미 결혼 적령기를 넘긴 35세의 나이.이때 그에게 나타난 사람이 지금의 남편인 박경배씨다.자신이 출연하 던 업소에서 자금관리를맡고있던 박씨는 친구처럼 다가와 인생의 동반자로 섰다.귀여운 딸 세인과 「열린 음악회 스타」란 명예를 함께 얻은 지금 그는더없이 행복하다.
장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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