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어느 나라 축구협회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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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 정영재 스포츠부 기자

올림픽 축구 아시아 최종예선 한.중전이 벌어진 지난 1일 창사 허룽스타디움. 5만 중국 관중의 함성과 손나팔 소리 한 귀퉁이에 200여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외침이 있었다. 험한 야유에 포위당하고도 대형 태극기는 당당하게 일렁였다.

경기 도중 붉은 악마 여성 응원단 한 명이 중국관중이 던진 금속물체에 머리를 맞아 다치는 어이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불상사는 이미 예상이 됐었다. 붉은 악마들이 입장할 때부터 일부 흥분한 중국 관중이 여기저기서 몸싸움에 가까운 시비를 걸어왔다. 1999년 10월 상하이에서의 한.중전 때 한국 유학생들을 집단 폭행한 적이 있는 그들이다.

한국축구의 올림픽 본선 5연속 진출의 쾌거 뒤에는 그렇게 위험을 무릅쓴 붉은 악마의 공(功)도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불 같은 국민의 성원을 머나먼 경기장까지 대신 가져간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대한축구협회가 4일 큰 결례를 했다. 홈페이지에 "중국축구협회가 지정한 자리에 앉지 않은 붉은 악마 쪽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축구 관련 사이트들에 뜬, 협회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는 글들에 대한 답변이었다.

"향후 중국에서 열리는 경기에 한국 응원단의 원정응원이나 관람을 일절 하지 말도록 권한다. 협회는 중국 원정응원단의 티켓 구입, 좌석 확보 등에 일절 지원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한마디로 '안전에 책임 못 지니 얻어맞기 싫으면 중국에 응원을 가지 말라'는 통보였다.

축구팬들의 분노가 빗발쳤다. "중국에 항의 한마디 못하면서 국내 팬을 이렇게 무시하는가"등등. 그러자 협회는 부랴부랴 '사과 및 해명'이라는 글을 다시 띄웠다. "원정응원 가지 말라는 게 아니며, 티켓 등 지원 부분도 중국 측의 안전이 확보된 후에 해주겠다는 뜻"이라고 말을 바꿨다.

붉은 악마는 그동안 축구협회가 챙겨왔고, 또 챙겨야할 대상이다. 이란전에는 전세기까지 동원해 줬고, 이란 측이 꺼리는 여성 붉은 악마들에게는 히잡을 쓰고 가도록 독려까지 했다. 이번에는 당연히 위험성에 대한 충분한 정보 제공과 안전 배려부터 먼저 했어야 했다.

축구의 승리와 이번 사건은 엄연히 별개다. 그런데 아직도 축구협회에는 자축하는 분위기만 있을 뿐이다.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인 정몽준 축구협회장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중국축구협회.아시아축구연맹.FIFA 중 어느 한곳에도 공식 항의나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정영재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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