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黨바뀌어야한다>5.競選制 과감히 도입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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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59년 조병옥(趙炳玉).장면(張勉)박사간의 민주당 대통령후보경선은 민주적 의사결정의 전형으로 꼽힌다.71년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후보간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야당사를 살펴보면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가 도 일단 승부가 가려지면 패자가 이를 깨끗이 승복하는 멋이 있었다.이른바 「경선의 미학(美學)」이다.
金대통령과 김대중 국민회의총재는 모두 경선을 통해 정치적 비약을 했던 인물이다.金대통령은 60년대 야당시절 경선을 통해 원내총무를 다섯차례나 하면서 정치적 스타덤에 올랐다.
김대중총재는 71년 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열세를 딛고 金대통령을 물리침으로써 큰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물론 金대통령도 당시 깨끗이 승복했기 때문에 오늘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평가다.90년대 여당에서 실시했던 대통령후보 경선과 경기도지사후보 경선에서 낙선,탈당했던 인사들이그후 선거에서 모두 낙선했던 사실은 하나의 교훈이 될 수 있다. 신한국당의 다수 의원들이 『92년 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떨어졌던 이종찬(李鍾贊)후보가 金대통령의 손을 들어주고 선거유세에 열성을 보였다면 내년 여권후보는 그가 틀림없이 됐을 것』이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정작 두 金씨는 자신들이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에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비판을 받는다.80년대에 들어와 군사정권과의민주화 투쟁이 급선무인데 경선으로 공작정치의 개입을 초래할 수도 있고 또 자체내 소모전을 펼 필요가 있느냐는 딴은 그럴 듯한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두金씨가 정당 주요간부와 선출직공직자의 경선을 거의 하지 않거나 꺼리는 태도는 아무래도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막강한 카리스마의 행사에 너무 빠졌다는 비판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14대 국회때인 지난해 2월9일.민자당(현 신한국당)은 집권당 사상 처음으로 총무경선을 시도했다.
국회 146호실.이춘구(李春九)대표는 봉투 하나를 쥐고 있었다.김영삼총재가 내린 2명의 총무후보 명단이었다.그의 손에는 실같은 땀방울이 맺혔다.장내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김영구(金榮龜.동대문을).현경대(玄敬大.제주)의원이 후보로올랐습니다.』 李대표가 발표하는 순간 박수와 탄성이 터져나왔다.총재가 경선 후보를 선택했다.불완전한 형태이긴 하지만 당내 민주화를 위한 작은 진전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후보인 金의원이 『한번 총무를 해봤다』며느닷없이 출마포기를 선언했다.의원들은 한동안 멍하니 있었고 玄의원도 당황했다.
민자당은 그나마 6개월후 총무경선제를 폐지해버렸다.「당내 민주화의 획기적 전기」라는 대대적 선전은 1년도 안돼 무색해지고말았다. 당시 재야출신 김문수(金文洙.현의원.부천소사)지구당위원장등 소장파는 크게 반발했다.『민주화에 대한 역행이고 승복하기 어렵다』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6.27지방선거에선 일부 경선이 있었다.그러자 국민회의에서 총재가 지명하지 않은 사람이 도지사후보에 선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선거후 『선생님,제가 당선돼 죄송합니다』고 했다는 그의 말은 한동안 정가에 유행했다.
15대 총선에서도 여야를 막론하고 경선은 없었다.
여당의 경우 공천권은 당총재인 金대통령의 고유권한으로 인식됐다.강삼재(姜三載)사무총장과 청와대 이원종(李源宗)정무수석의 역할이 컸다는 소문속에 「좌(左)원종 우(右)삼재」란 말도 나돌았지만 자료정리 역할로 보면 될 것이다.
국민회의도 김대중총재가 생사여탈권을 행사했다.측근 권노갑(權魯甲)의원이 거드는 정도였다고 한다.신한국당이 한국노총출신 박종근(朴鍾根)후보를 공천한 안양만안 선거구에 국민회의 공천심사위원들은 민주노총 이목희(李穆熙)씨를 만장일치로 내세웠지만 결국 다른 인물이 공천을 받았다.총재의중의 인물이었다.
자민련은 김종필(金鍾泌)총재의 전권행사에 일부 낙천자들이 당무를 거부하기도 했다.납득할만한 절차가 생략된채 밀실에서 총재개인의 의향에 따라 낙점되고 있으니 탈락자가 승복할리 없다.우리네 정당들이 말로만 민주정당이라는 현실을 적나 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경선의 부작용도 있다.70년대 야당총재 경선장에 각목이난무하고 집권세력이 정치공작을 했던 것은 대표적 사례다.
민주화시대에도 부작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93년2월8일 민주당 박계동(朴啓東.강서갑.15대 낙선)의원은 『지구당위원장이중앙당 지명에 의해 사전 각본에 따라 선출돼서는 안된다』며 경선을 선언했다.그래서 지구당부위원장(金容俊)과 경합을 벌이게 됐다. 朴의원은 14대에서 의정활동을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했고경선제도를 도입했다는 「공로」만으로도 낙승이 예상됐다.그러나 결과는 똑같이 71표.『대의원을 매수했다』는 비난이 서로 오가더니 나흘 뒤인 12일 별도로 지구당개편대회를 열어 두명의 위원장이 탄생하는 해프닝마저 벌어졌다.
정치문화가 성숙되지 못한 상태에서 경선은 얼마든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그렇다고 부작용 때문에 선출직 공직자와 정당 주요간부의 경선을 주저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 일반적 정서다.
연세대 신명순(申命淳.정치학)교수는 경선제를 정당민주화의 핵심으로 꼽았다.그는 『정당이 총재 개인의 사당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정당의 토론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직위는 경선으로 뽑아야 한다』고 했다.그게 민주주의 원칙 을 가꾸면서사당화를 막고 토론문화를 활성화하면서 선출직 공직자들의 자질을검증하고 높이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申교수는 『어렵고 힘들더라도 외국처럼 지역구 당원들이 직접 지역에서 출마할 의원후보를 뽑지 않는한 우리네 정치의 민주화는불가능하다』고 했다.윤영오(尹泳五.정치학)전국민대교수도 『당내민주화를 위해 총장.총무등 주요당직자의 자유경 선과 국회의장단.상임위원장들이 의원들에 의해 선출되는 경선제의 과감한 도입이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느닷없이 出馬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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