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먼은 뛰어난 배우이자 존경받는 예인이었고 인도주의를 실천한 자선사업가였다. 영화계는 마지막까지 스크린을 떠나지 않았던 그의 열정과 인간미, 모범적인 사생활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에 애도를 표했다.
1953년 연극 ‘피크닉’으로 연기자 생활을 시작한 뉴먼은 54년 영화 ‘은배’로 스크린에 데뷔, 50여 년간 80여 작품에 출연했다. 그는 슬럼프나 굴곡없이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저력의 연기자로 통한다. 화려한 수상기록이 그를 말해준다. 58년 칸영화제 남우주연상(‘길고 긴 여름날’)과 95년 베를린영화제 연기자상(‘노스바스의 추억’), 62년 영국아카데미 남우주연상(‘허슬러’). 2006년 골든글로브 TV부문 남우조연상 등을 수상했다.
다만 아카데미와의 인연은 짧았다. 59년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로 처음 후보에 오른 뒤 87년 ‘컬러 오브 머니’로 남우주연상을 받을 때까지 7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86년 아카데미는 그에게 공로상을 주어 섭섭함을 달랬다.
1973년 영화 ‘스팅’에서 능글맞은 사기 도박사 헨리 곤도르프 역으로 나온 폴 뉴먼.
뉴먼은 동시에 뛰어난 사업가이자 박애주의자였다. 82년 식품회사 ‘뉴먼즈 오운’을 세운 그는 손수 만든 샐러드 드레싱으로 큰 성공을 거뒀으나 이 사업으로 얻은 수입 전부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책임지는 부자’라는 자선단체도 설립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했다. 최근 몇 년간 암투병을 해온 그는 건강이 악화하자 지난해 6월 미국 ABC와의 인터뷰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기억력과 자신감, 창의력이 점점 퇴화되고 있어 내가 원하는 수준의 연기를 더이상 보여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2006년 애니메이션 ‘카’의 목소리 연기와 ‘카메라 앵글 속의 아버지’(2004), ‘로드 투 퍼디션’(2002) 등이다.
모범적인 가장으로 할리우드 최고의 ‘바른생활 사나이’로 통했던 그는 두 번째 부인인 조안 우드워드와 ‘브리짓 부부’ 등 여러 영화에 동반 출연했다.
뉴먼의 타계에 영화계는 깊은 슬픔을 표하고 있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나는 진짜 친구를 잃었다. 내 삶과 이 나라는 그가 있었기에 더 나을 수 있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뉴먼과 ‘선택’에 함께 출연했던 샐리 필드는 “가끔 신은 완벽한 인간을 만드는데 뉴먼이 그런 인간이었다”라고 평했다. 케빈 스페이시는 “자신의 성공을 다른 사람을 돕는데 이용했던 그는 모든 연기자들의 귀감이자 겸손한 거인”이라 고 말했다.
애도는 영화계 밖으로까지 이어졌다.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부부는 성명을 내고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아이콘이자, 박애주의자이며, 어린이들의 영웅”이라고 평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모든 남자들은 닮고 싶었고, 모든 여자들이 흠모했던 최고의 ‘쿨 가이’었다”고 말했다.
뉴먼이 세운 자선단체 ‘더 홀 인 더 월 갱 캠프(the Hole in the Wall Gang Camp)’의 마이클 래더스토프는 “뉴먼은 종종 캠프에 들러 어린이들과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면서 “대부분 아이는 그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뉴먼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회상했다.
양성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