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155. 발을 써라, 놀라운 일 생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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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올림픽 무렵이다. 서울에 온 미국인 친구와 함께 잠실야구장에 갔었다. 그에게 멋진 야구장과 한국프로야구를 보여주고 싶었다.

경기가 끝나고 그에게 "네가 본 한국야구는 어떠냐" 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이 친구들, 도대체 뛰질 않는군.(I couldn't see them running)"이라며 시큰둥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 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찬찬히 설명을 해줬다. "선수들 체격도 좋고, 던지고 치는 건 나름대로 수준이 높아. 그런데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아직 깊이가 없어. 주자들을 보니까 알겠더군.'뛰는 야구'에서 메이저리그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어."

'뛰는 야구'라….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발'을 이용한 야구다. 공이나 방망이로 하는 야구가 아니라 발로 하는 야구. 그 야구는 빠른 발만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현명하고 똑똑한 발이 필요하다. 상대수비의 빈틈을 타서 한 베이스를 더 가고, 늘 전력질주와 허슬플레이를 하며, 언제 민첩한 슬라이딩과 거친 슬라이딩을 해야 하는 지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할 줄 아는, 그런 야구다. 그 뛰는 야구에서 한국프로야구는 아직 아마추어 수준이다."

그때 한국야구의 수준을 자랑하려 했던 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난 15년 동안 그때의 기억을 아프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4월 27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LG-SK와의 경기를 TV로 보다가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다.

7회 말 LG 공격. 1사1루에서 권용관이 친 타구가 좌중간 쪽으로 떴다. 깊은 타구가 아니었다. SK 좌익수 조중근이 여유있게 공을 잡았다. 그 순간, LG 1루 주자 이용규가 2루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좌중간 깊지 않은 플라이 때 1루 주자가 리터치해서 2루까지 간다?' 이건 그때 그 미국친구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뛰는 야구'가 되기 충분했다. 이용규는 2루에서 세이프됐고, 후속 최동수의 적시타 때 득점에 성공했다. LG가 2-1로 아슬아슬하게 앞서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용규의 '발야구'는 경기의 흐름 상 굉장히 중요했다.

이튿날 반가운 마음으로 잠실구장을 찾아가 이용규를 만났다. 어떤 판단으로 뛴 건지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고교 때부터 유심히 봤는데 좌익수들은 좌중간 타구를 잡았을 때 직접 2루나 3루를 향해 던지지 않고 중계하는 경우가 많다. 혹 좌익수가 뛰는 나를 보고 직접 2루로 던져도 송구가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또 1루에서 2루로 뛸 때는 좌익수가 던지는 송구를 보고 그 각에 따라 되돌아 올 것이냐 계속 달릴 것이냐를 결정할 수 있다. 물론 (조)중근이 형의 어깨가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도 판단의 기준이 됐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경기상황(7회 말 1점 차의 리드)과 타순의 흐름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이용규의 뛰는 야구는 빈틈이 없다. 이용규의 현명한 발야구를 보면서 던지고 때리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일부 선수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발을 써라, 놀라운 일이 생긴다"라고.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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