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세상 탐사]‘심은경’ 대사, 촛불을 잠재울 것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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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02면

촛불은 반미를 상징한다. 2002년 촛불은 반미의 열기를 뿜었다. 미군 차량에 의한 여중생 사망 때다. 올해 광우병 쇠고기 촛불은 반(反)이명박과 반미를 치밀하게 묶었다. 촛불 주도 세력은 대중 선동의 역량을 뽐냈다. 광우병 엉터리 괴담을 진실처럼 포장했다. 중국산 식품의 멜라민 공포가 확산됐다. 촛불 시위대는 쇠고기 파동 때와는 딴판이다. 식품 안전의 외침은 없고 얌전하다. 멜라민 진원지가 미국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촛불 생산 기지에는 반미·친북 집단이 버티고 있다.

촛불은 이명박 정권의 무기력을 의미했다. 그것은 주한 미국 대사의 낙담과 시련을 겨냥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는 쇠고기 파동 때 대사였다. 그는 “틀린 정보와 소문이 논쟁을 지배하는 데 좌절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촛불에 가장 크게 데인 대사는 토머스 허버드다.

재임 시절 허버드 대사는 노무현 당선의 1등 공신 중 한 명이다. 물론 역설적 평가다. 2002년 11월 효순·미선양 죽음을 다루는 주한미군 재판이 있었다. 미군 차량 사병들은 무죄 평결을 받았다. 훈련 중 고의성이 없는 사고라는 이유에서다. 그 직후 촛불은 거세게 타올랐다. 대선 한 달 전이다. 이회창 후보는 곤경에 빠졌다.

재판이 대선 후로 늦춰졌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반미 이슈가 대선 흐름을 장악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무죄 평결은 예상됐고 반미 감정을 고조시킬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허버드는 둔감했다. 정보 판단의 허술함인지, 아니면 “촛불쯤이야” 하는 오만 탓이었는지 안이했다. ‘주재국 넘버 원’인 대사는 ‘넘버 투’인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재판 연기를 지시하지 않았다. 무죄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 거리에 분노와 항의의 후폭풍이 불었다.

2007년 대선 때 반미는 별로 등장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민감한 사안을 미뤘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도 중단했다. 그만큼 2002년 촛불은 미국 외교의 고통스러운 악몽이다. 1970년대 리처드 스나이더 대사는 박정희 정권에 핵개발 포기를 요구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은 인권 개선을 주문했다. 그들의 압박에는 때로 거만함이 드러났다.

그런 강대국의 우월감 표출은 한·미 관계에서 씁쓸한 기억이다.
캐슬린 스티븐스 신임 대사가 지난주 서울에 왔다. 첫 여성 주한 미국 대사다. 한국 이름은 ‘심은경’. 75년(22세)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왔다. 예산중에서 영어교사를 했다. 한국말을 잘한다.

스티븐스는 편하게 부임했다. 전임자들과 달랐다. 그런 여유는 이명박 정권이 등장한 덕분일 것이다. 노무현 정권 때 기세를 올렸던 반미 세력은 소수로 밀려났다. 그들의 이중성도 들통 났다. 반미 세력의 핵심 다수는 자녀들을 미국에 유학 보냈거나 그곳에 두고 왔다. 그들 중 일부는 자녀들에게 미국 영주권을 따게 했다. 그들은 그런 사연들을 덮었다. 하지만 다수 국민은 그들의 역겨운 위선을 알아챘고 분개한다.
스티븐스는 한국 현대사에 익숙하다. 그는 대사관 정무팀장(84~87년)을 지냈다. 한국의 민주화 열망이 분출했을 때다. 그때 광주 비극의 미국 책임론이 퍼졌고 운동권에서 군사정권 후원자로 미국을 지목했다. 그의 정무팀은 그런 인식과 오해를 바꾸는 데 힘을 쏟았다. 당시 제임스 릴리 대사가 야당 지도자(김영삼·김대중)를 만날 때 그는 통역을 했다.

전 세계 미국 대사들은 워싱턴의 메신저다. 재량권도 한정돼 있다. 그러나 서울 주재 공관장은 다르다. 한국의 역동성은 현지 대사의 특별한 순발력과 재능을 요구한다. 한·미 동맹의 복원과 도약은 스티븐스의 목표다. 반미 촛불을 잠재우는 것도 숙제다. 그것은 한국 정부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 서부(애리조나주에서 성장) 출신다운 호기심 넘치는 도전정신을 갖고 있다. 전임 대사들(힐·버시바우)은 동부 출신이다. 스티븐스의 경력은 독특하고 경쟁력 있다. 그가 펼칠 외교 드라마가 얼마만큼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시대 흐름에 맞는 역할 모델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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