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장관들, 대통령 메뉴 학습하느라 진짜 집중할 데 못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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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07면

-미국발 금융위기를 어떻게 보나.
“10년 넘게 쌓여 온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 게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이번 위기가 왜 발생했는지를 곰곰이 따져 보면 수습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 거란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12년 호황의 대가는 결코 만만찮을 것이다.”

‘97년 환란 때 경제수석’ 강봉균의 위기 진단

-너무 비관적 전망이 아닌가.
“시장경제가 아무리 발전해도 경제의 본질인 상품·서비스의 생산과 공급이 뒷받침되지 않는 소득 증가는 거품일 뿐이다. 그런데 미국 경제는 이를 외면한 채 파생상품 등 머리 굴리기로만 돈을 벌었다. 그래서 더욱 수습이 간단치 않을 거다.”

-미국 정부가 70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구제금융안까지 마련했는데.
“그 돈은 가시권에 들어온 부실채권을 사 주는 정도에 불과하다. 문제는 위기가 발생할 당시에는 멀쩡하던 기업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동반 부실의 늪에 빠져들게 된다는 점이다. 결국엔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의 자금이 투입될 수밖에 없을 거다. 우리도 64조원이면 될 줄 알았는데 150조원이나 들지 않았나.”

-우리 경제는 상대적으로 영향이 적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 금융 부실과 직접 연관된 부분이 적고 파생상품도 덜 발달해 그나마 다행이지만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다. 우리는 경제 규모에 비해 훨씬 개방된 나라다. 미국과 유럽 경제의 영향을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세계 경제가 다시 성장세로 돌아서는 데 최소한 2년은 걸린다고 보면 우리도 2년 정도는 꾹 참고 시스템 안정화에 주력해야 한다.”

그의 말은 신중했지만 분명했다. 10년 전 경험이 그에게 생생한 판단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듯했다. 당시 얘기를 좀 더 들어봤다.
 
부실 책임 제대로 묻는 게 관건
-10년 전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뭐였나.
“전 세계적으로 우리처럼 총체적인 경제 위기를 경험한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처방을 내리는 데 레퍼런스(참조할 만한 사례)가 없었다. 뭐든지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했다.”

-주로 누구랑 상의했나.
“이규성 재경부 장관, 이헌재 금감위원장, 진념 기획예산위원장 등 네 명이 거의 매일 만났다. 기자들 접근이 안 되는 청와대 내부 회의실과 청와대 옆 안가 두 군데를 주로 활용했다. 무엇보다 IMF를 설득하는 게 발등의 불이었다. IMF는 고금리와 재정긴축 두 가지를 제시했는데, 일반적인 개도국 기준에 따른 것이어서 우리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처방이었다. 자금 경색에 고금리까지 겹치니까 중소기업이 자꾸 무너졌다. 또 민간 부문 수요가 움츠러드는데 정부 쪽까지 긴축하라는 건 실업을 방치하라는 말과 똑같았다. 끊임없이 얘기한 끝에 겨우 바로잡을 수 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1년 반 만에 위기를 극복했는데, 어떤 전략이 주효했다고 보나.
“포인트는 이거다. 우리는 위기를 발생시킨 사람들에게 상당한 책임을 물었다. 금융기관에서 경영은 제대로 못 하면서 보수만 많이 받은 사람, 부실 대출에 연루됐던 사람에게 해직은 물론이고 손해배상 책임까지 물었다. 또 은행원의 거의 절반인 45%가 감축됐다. 미국 정부도 우리처럼 제대로 인력 구조조정을 할지가 관건이다. 7000억 달러나 투입되는데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고 미국 국민이 골고루 비용과 고통을 나눠 지도록 하면 모럴 해저드만 커지고 후유증이 오래갈 것이다.”

-지나고 보니 아쉬웠던 점은 없나.
“실업대책을 세울 때나 경기 회복을 전망하는 데 너무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잘 될까, 과연 효과가 날까…. 당시 대부분의 학자도 후유증을 털고 일어나는 데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걸린다고 했다. 솔직히 우리도 그렇게 빨리 회복될 줄 몰랐다. 힘들더라도 근본적 구조조정에 좀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여 자연스럽게 살아나게 해야 회복도 건강하게 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근본 치료에 좀 더 집중해야 했다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다. 금융기관과 대기업 구조조정이 제대로 끝나지 않은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나.”
 
경제 관료들도 입 다물어
-이명박 정부의 대응은 어떻게 평가하나.
“굉장히 서두르고 있다. 7~8% 성장이란 대선 공약에만 집착하는데 ‘Forget!’이라고 외치고 싶다. 거기에 집착할수록 신뢰만 떨어진다. 지금 정부가 경기부양책을 써서 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 한도가 1%를 넘지 않는다. 그만큼 시장경제에 좌우되는 시스템이 돼 버렸다.”

-부동산과 건설경기 활성화를 돌파구로 삼고 있는데.
“거래를 어렵게 하는 요소를 바로잡는 건 찬성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증시 전망이 안 좋으면 돈이 부동산 쪽에 집중돼 과열 양상을 띨 우려가 크다. 부동산 흐름은 큰 강물과 같아 물길을 바로잡는 데 최소한 1년은 걸린다. 잘못 건드리면 그렇잖아도 힘든 상황에 혹만 늘어날 뿐이다.”

-그린벨트 해제 논란도 뜨겁다.
“현 정부가 그린벨트까지 풀어 집을 지었는데 제대로 분양이 안 되면 그렇잖아도 어려운 건설업계가 회생 불능 상태에 빠질 우려가 크다. 그러면 이들 업체에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까지 연쇄적으로 부실해질 수 있다. 지금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건설경기 부양을 통해 과연 내수 진작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감세에 대한 견해는.
“내년에 경기가 위축돼 있는 상황에서 세율까지 낮추면 세금 걷기가 정말 어려워질 것이다. 재정적자를 감당하겠다면야 문제가 없지만 나의 오랜 경험으로 볼 때 국세청이란 막강한 기관이 나서서 기어이 목표를 달성하고 말 것이다. 가장 걱정되는 건 그 과정에서 이익도 못 낸 기업들이 국세청의 닦달에 못 이겨 없는 돈 끌어 모아 세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지 않나.
“금융위기가 발생한 바로 그 주에도 그린벨트를 푼다, 신성장 대책을 낸다 하며 떠들석한데, 문제는 지금 경제장관들이 대통령이 벌이는 메뉴를 학습하느라 진짜 집중해야 할 일에 집중을 못 한다는 데 있다. 경제부처 관료들을 한 번 만나 보라. 온통 혼이 다 빠져 있지 않은가. 국민이나 금융기관, 외국인투자자를 안심시키려면 대통령이 현 사태의 파장을 줄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데 향후 10년치 주택 건설 목표나 얘기하고 있으니….”

-경제 관료들도 혼란스러워한다는 말인가.
“모두 입을 꼭 다물고 있다. ‘프리 디베이트(자유토론)’라는 경제부처의 오랜 전통이 사라져 버렸다. 청와대의 구호가 너무 거창한 게 문제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 묻자 그의 말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감정은 끝까지 자제했다. “이건 여야 정쟁을 떠나 국가의 운명이 달린 문제”라고 했다. 그런 만큼 IMF 위기를 극복했던 노하우가 현 정부의 위기 대처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랐다. 이제 그의 10년 전 경험을 활용하는 것은 현 정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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