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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호의 시장 헤집기] 금융공학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1호 35면

빌려간 돈 갚아라. 돈 없다, 못 갚겠다. 실랑이 끝에 ‘배 째라’는 말까지 나오면 그 돈은 거의 떼인 셈이다. 개인 간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나라 사이에도 드물지 않다. 이를 채무불이행, 디폴트(default)라고 한다. 남의 얘기 할 필요 없다. 우리도 외환위기 때 배 째기 직전까지 가 봤다.

빌려준 입장에선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르고 달래도 정말 돈이 없는데 어쩌겠나. 그런데 채권자들에게도 묘안이 생겼다. 1980년대 멕시코가 빚을 못 갚게 됐을 때였다. 돈을 물린 미국 은행들이 비실거렸다. 미국에서도 돈이 안 돌게 됐다. 이때 미국이 내놓은 게 ‘브래디 플랜’이었다. 니컬러스 브래디 당시 재무장관의 이름을 딴 것이다.

미국 은행들은 가지고 있던 멕시코 국채를 할인해 ‘브래디 채권’이라는 새 증권을 만들었다. 이 채권은 세계은행이나 유럽·일본의 은행들에 팔려 나갔다. 이들은 멕시코에 진출하려는 다국적기업들에 채권을 넘겼다. 달러가 바닥난 멕시코 정부는 이 채권을 민영화된 공기업 주식으로 바꿔줬다. 다국적기업들은 그런 식으로 멕시코 산업에 손쉽게 수저를 얹었다. 결과적으로 미국 은행들은 주름을 펴게 됐다. 언제 받을지 모르는 원리금을 약간 싸게라도 일찍 회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증권화의 효과였다.

미국에서 증권화에 새 바람을 일으킨 사람으론 정크 본드 투자로 유명한 마이클 밀켄이 대표 선수다. 위험은 크지만 들어맞으면 대박 나는 게 정크 본드 투자다. 위험을 감수하고 돈을 거는 것이다. 밀켄 본인은 내부자 거래로 좌절했지만 그의 리스크 비즈니스는 월가에 뿌리를 내렸다.

이런 공격형 투자를 위해 위험을 줄이거나 분산하는 기법이 속속 등장했다. 여기에 사용된 게 금융공학이다. 그 수학적 기초는 확률론인데 17세기 파스칼의 연구를 기원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이를 주식시장에 응용한 것이 1900년 프랑스의 루이 바슐리에의 박사 논문이다. 이어 52년 해리 마코위츠의 포트폴리오 이론, 73년 피셔 블랙과 마이런 숄스의 옵션 방정식으로 금융공학은 꽃을 피웠다. 또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로켓과학자들이 월가로 나와 파생상품을 개발했다. 이게 미국 금융시장을 크게 발전시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서민들이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린 것까지는 좋다. 그 다음에 복잡한 증권화를 거치면서 문제가 됐다. 모두 떡고물 뜯어먹을 때는 조용했다. 하지만 집값 떨어지고 빚 못 갚는 사람들이 나오자 수습이 안 됐다. 난해한 금융공학 때문에 손실이 얼마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원래 증권화란 시장에 돈이 잘 돌도록 하자는 것이다.

금융공학은 이를 보다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기술이다. 그러나 지금은 과도한 증권화가 되레 위기를 몰고 왔으니 본말이 한참 뒤바뀐 셈이다. 그래서 증권화와 금융공학이 위기의 주범으로 몰렸다. 사실은 인간의 탐욕이 부른 사고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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