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Art] 한국 온 세계 문화거장 2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세계의 문화 거장들은 21세기 문화의 흐름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을까. 뮤지컬 글로벌화의 시초 ‘캣츠’의 연출자 트레버 넌과 인간의 숨결이 가미된 로봇 ‘기동전사 건담’의 창조자 도미노 요시유키가 그 비밀을 설파했다. 둘은 24일 서울 상암동 DMC에서 개막한 ‘제1회 대한민국 콘텐츠 페어’(문화체육관광부·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주최) 기조 연설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과연 뮤지컬이 지금처럼 전 세계 무대예술의 꽃으로 피어날 수 있었을까.

뮤지컬 ‘캣츠’를 만들어 뮤지컬 글로벌화의 기초를 다진 세계적인 연출가 트레버 넌(68·사진)이 한국을 찾았다. 3년 전 뮤지컬 ‘아이다’ 격려차 한국을 찾은 작사가 팀 라이스와 더불어 트레버 넌은 지금껏 내한한 뮤지컬 관련 해외 인사 중 단연 최고의 거장이다. 24일 기조 연설에서 그는 미래 문화산업의 원동력이 될 ‘디지털 스토리텔링’에 대해 역설했다. 이에 앞서 트레버 넌은 이날 오전 별도의 기자 간담회를 했다. ‘캣츠’와 ‘레미제라블’ 등 세계 4대 뮤지컬 중 두 작품의 초연 연출을 하면서 있었던 비화와 영국을 대표하는 연극 연출가로서의 소회 등을 소탈하게 털어놓았다.

#보수의 계승자, 혁신을 부르짖다

1981년 뮤지컬 ‘캣츠’에 트레버 넌이 연출가로 참여한 건 일대 사건이었다. 그는 당시 영국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Royal Shakespeare Company·RSC)의 예술감독이었다. RSC가 어떤 곳인가. 100년의 역사가 넘도록 셰익스피어의 작품만 올리는, 세계 최고 권위의 극단이자 영국의 자부심 그 자체다. 게다가 당시 영국에서 뮤지컬은 저급한 볼거리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적지 않았다. 만들어지는 작품 수도 적었으며, 설사 무대에 올려진다 해도 그저 돈벌이에 급급한 쇼비즈니스로 취급받곤 했다.

그런데 예술의 가장 꼭대기에 있어야 할 트레버 넌이 뮤지컬 연출을 한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영국은 들썩였다. 곳곳에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뮤지컬계에서도 “딱딱한 무대로 흥미만 떨어뜨릴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담담했다. “지금도 생생합니다. 여덟 살 때 누나가 그림 대회에 나가 상을 탔는데 부상이 뮤직홀에서 열리는 보더빌(스토리가 없이 춤과 노래, 서커스와 촌극이 나열식으로 진행되는 쇼) 티켓 2장이었습니다. 얼마나 즐겁던지…. 음악과 연이 닿기 시작한 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학(케임브리지대)에서 연극 관련 공부를 할 때도 전 록그룹 리드기타였고 보컬도 했습니다. 연극하는 사람이 뮤지컬을 한다고 불명예라고 여기는 건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비난과 우려가 비등했지만 트레버 넌은 ‘캣츠’의 구세주였다. ‘캣츠’는 T S 엘리엇의 시가 원작이다. 다소 추상적이고 난해한 시적 언어를 구체적인 무대로 만드는 데 있어 트레버 넌이 RSC에서 오랜 기간 다져왔던 문학성과 연극성은 강력한 무기였다. 게다가 그는 연출가로서의 고집을 내세우기 보다 안무가 질리언 리에게 길을 열어줌으로써 고양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마당을 제공했다.

그는 ‘캣츠’의 대표곡 ‘메모리’에 얽힌 일화도 소개했다.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까지 인상에 남는 음악이 없다는 게 불안했습니다. 마침 엘리엇의 미망인이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몇 개의 시를 뒤늦게 알려 줬습니다. 거기에 ‘그리자벨라’라는 늙은 창녀고양이가 있었고, 이를 위해 ‘메모리’가 뒤늦게 추가됐죠.”

#전통을 현대화시켜 대중 설득하라

그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2개의 국립극단인 RSC와 내셔널시어터(National Theater·NT)의 예술감독을 각각 18년, 6년씩 맡았고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 정도 내공이면 작품을 만들 때 어떨 것을 고민할까. 대답이 의외였다. “국립극단 작품들은 표를 다 팔아도 수익을 남기기 힘듭니다. 심지어 1년에 300만 파운드(약 64억원)를 손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술감독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은 후원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저녁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연출 지시를 하면서 머리에 그리는 건 ‘투자자들의 돈’입니다.”

그의 무대 언어는 모던하다. 특히 황금기의 서막을 연 ‘오클라호마’를 1999년 리바이벌하면서 보여준 미니멀한 무대는 충격이었다. 이후 ‘전통의 현대화’는 뮤지컬의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되었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질 뻔하던 고전들이 잇따라 새롭게 빛을 보게 됐다. 올 토니상을 휩쓴 ‘남태평양’ 역시 1950년대 작품을 현대적 언어를 탈바꿈시켜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낸 예다.

“전 RSC에서 ‘리어왕’ ‘맥베드’ 등을 공연할 때도 그저 과거를 추종하지 않았습니다. 셰익스피어 역시 신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대본은 그가 살았던 16세기적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지만 과연 ‘동시대인들에게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설득력있게 제시하는가’입니다. 무대·의상·특정 대사 강조 등이 방법입니다.”

최근에 그가 연출해 빅히트를 기록한 연극 ‘로큰롤’에서도 음악은 비중 있게 쓰인다. 언제나 정극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에게 음악은 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숙명이었다. “지금도 나이애가라 폭포에서 외줄타기를 하듯 작품을 만든다. 밑을 봐서 안 된다”고 말하는 트레버 넌. 어쩌면 이런 비장미가 20여 년의 시간과 전 세계라는 공간을 뛰어넘어 그의 무대 언어가 보편성을 띠게 된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트레버 넌은 25일 한국어로 공연되는 ‘캣츠’를 관람할 예정이다. 

글=최민우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트레버 넌=1940년 영국 런던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연극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RSC에 들어갔고, 입단 4년 만에 최연소 예술감독에 올랐다. 연극 ‘헨리 5세’ ‘오셀로’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올렸으며, ‘캣츠’ 연출 이후 뮤지컬로 영역을 확대해 ‘레미제라블’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 ‘선셋 블러버드’ 등의 히트작을 냈다. 최근엔 뮤지컬 버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올리기도 했다.



“건담 시리즈 더 이상 없다”

29살 로봇과 작별 선언

원작자 도미노 요시유키 감독

 “앞으로 건담 시리즈는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탄생 30년을 앞두고 있는 건담의 부활은 불가능한 것일까. 일본 TV 애니메이션의 대명사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의 원작자 도미노 요시유키(富野喜幸·67·사진) 감독은 “더 이상의 건담 시리즈 제작은 없다”고 못 박았다.

1979년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를 발표해 ‘건담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는 도미노 감독은 ‘기동전사 Z건담(1985)’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1988)’ 등 많은 건담 시리즈를 발표했다. 감독 스스로가 몇 편인지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는 건담 시리즈의 꾸준한 인기에 대해 “지구가 1000년, 2000년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어린이 입장에서 생각해서 만든 로봇시리즈 건담이 이렇게 고유명사처럼 지속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도미노 감독은 건담 시리즈가 마징가Z·게타로보 등 거대한 로봇물 위주이던 애니메이션계에 스토리를 강조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왔다고 자평했다. “마징가Z와 같은 건담 이전 작품들은 애니메이션이 장난감이라는 세계로 종결돼 온 반면 건담 시리즈는 현실적인 스토리를 제공해 시청자를 건담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게 했다. 거대한 로봇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스타워즈에 근접하도록 변화시킨 것이다.”

도미노 감독의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 [반다이코리아 제공]

그는 건담이 인간의 실제 사회를 반영한 고유의 세계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가상세계 안에 전쟁과 같은 인간사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것이다. 그는 “팬들이 건담을 좋아하는 이유는 고유한 세계를 지니고 있고 그 세계 자체의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일각에 알려진 것처럼 한국의 80년대 독재상황 등 특정한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건담 시리즈를 만들어 온 과정이 도미노 감독에게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완구 업체, 방송국의 스폰서에 따라 제작 여부가 결정되는 환경 때문이었다. 그는 1993년 발표한 ‘기동전사 V건담’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도미노 감독은 “내게 건담은 ‘기동전사 Z건담’의 엔딩으로 끝이었지만 스폰서들은 내게 또 건담을 만들기를 원했고, 생활상 이유도 있고 해서 V건담을 만들었다”고 털어놓았다.

한편 도미노 감독은 건담 시리즈를 실사 영화로 만들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TV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트랜스포머’와 같은 실사 영화를 만들고 싶어 2~3년 전 건담의 실사 영화 가능성을 타진해 봤지만 애니메이션처럼 10년, 20년씩 갈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글=이현택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 중앙일보 라이프스타일 섹션 '레인보우' 홈 가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