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희칼럼>두얼굴의 IOC 거듭나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사시나무 떨듯 하는 왼손을 모아쥐며 간신히 성화를 점화시킨 무하마드 알리의 영상이 상징하듯 근대올림픽 1백주년을 기념하는제26회 애틀랜타올림픽은 어딘가 껄끄러운 여운을 남긴채 막을 내렸다. 21세기 새로운 1백년을 지탱해야 할 올림픽의 미래상을 정립하려는 하나의 시도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선택한곳이 애틀랜타였으며 거기에는 올림픽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를 희생시킨 상업주의의 잔영이 드리워져 있다.
따라서 애틀랜타올림픽의 성패 여부는 장차 IOC와 올림픽운동에 대한 중요 변수로 남는다.
1백년동안 올림픽이 숱한 도전을 물리치고 번영의 길을 걸어오게 된 것은 올림픽에 관한한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 IOC의장악력 때문이다.88서울올림픽을 치러본 우리로서는 IOC의 고답적 권위주의의 실상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애틀랜타대회의 핵심은 상업주의에 대한 검증과 올림픽정신에 대한 훼손방지에 있고 IOC가 이를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관심의 초점이었다.그러나 이 두가지 의문은 IOC의 장악력에 누수(漏水)현상이 생김으로써 의문으로 남게 됐다.
이 하늘을 찌를듯한 IOC의 장악력이 미국만은 늘 예외로 치부돼왔기 때문이다.LA가 그랬고 애틀랜타가 그랬듯이 이른바 민영이라는 미국의 독특한 올림픽운영은 재정보증을 아무런 보장없이주최측에 일임하도록 하는 선례를 남겼다.
인류의 제전은 마침내 기업경영시스템으로 일관하게 되고, 따라서 상업주의의 마이너스적 요소들이 전면으로 얼굴을 내밀게 됐다.이 바람에 곤욕을 치른 것은 선수들과 선의의 제3자인 관객들이었다. 올림픽의 이상은 정신과 육체라는 두개의 바퀴로 평형을유지하는데 있다.상업주의의 팽배는 금메달 지상주의로 흘러 정신의 피폐로 이어졌고 그런 의미에서 올림픽운동의 최고 책임자이며정신적 지주인 사마란치 IOC위원장의 애틀랜타 발언은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는 한 TV 인터뷰에서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와 옛동독의 호네커를 대단히 존경한다』고 말하고 그 이유로 두사람 모두 스포츠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그는 또 『올림픽은가톨릭의 교리보다 중요하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뉴욕 타임스지는 『가까이 가기가 어렵지만 생각이 모자라는 군주같다』고 혹평했다.스포츠발전에 대한 공로와 존경의 대상을 혼동하는 단세포적 사고의 언저리에서 올림픽 위기의 편린을 보았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그의 논리대로라면 히틀러 도 존경의 대상이 된다는 얘기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는 IOC의 역할이 절대적인 것은두말할 필요가 없다.애틀랜타올림픽에 IOC의 장악력이 약했던 것은 IOC가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두개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백년을 지탱해온 거대한 거울 앞에 스스로를 비춰보면서 새롭고 건강한 올림픽상의 정립을 위해 IOC부터 긴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을 애틀랜타올림픽은 교훈으로 남겨놓은 것인지 모르겠다. 〈KOC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