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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 덩어리 미술의 열정 그걸 객관화한 영화의 냉정 엎치락뒤치락 내게 남는 건 번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0호 10면

‘맨발의 청춘’을 노래하는 이준익 감독은 집 뜰에 내건 해먹에 누워 “잘 쉬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정재숙 기자

오십을 눈앞에 둔 남자가 똥배는커녕 주름살도 찾기 힘들다. 깡마른 몸피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듯한 검정 티셔츠와 청바지가 섹시해 보인다. “잠깐만…” 소리치더니 부엌으로 뛰어가 뚝딱 커피 두 잔을 만들어온다. 맨발에 샌들을 끌고 야구 모자 눌러쓴 이 남자는 어디로 튈지 몰라 럭비공이라 불리는 영화감독 이준익(49)씨다. 막무가내 인터뷰를 안 하겠다는 그를 찾아 새벽같이 홍은동 꼭대기 마을버스 종점 언저리 집으로 쳐들어갔을 때, “잡혔네” 벌쭉 웃더니 느닷없이 자신이 죽었을 때 세워줬으면 하는 묘비명 얘기부터 꺼냈다. “열심히 도망쳤는데 여기까지밖에 못 왔네.”

아름다운 인생 전환② 이준익 영화감독

도망자의 심리
-도망치는 게 취미인가 봐요.

“끊임없이 도망가고 싶어요. 외화 수입·배급할 때 70억원 손해 보고 빚쟁이들 몰려올 때도 버티던 난데 요새는 자꾸 어디론가 달아나게 돼요. 일에서 일로 뛰어다니는 게 싫어졌어요. 생산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지. 나도 자본주의의 속물이었거든. 우리가 뭘 안 하고 쉬는 걸 배운 적이 없잖아요. 너무 힘들어. 멈춰 서 있으면 죽는 줄 알잖아. 끔찍해요. 이럴 때 알렉산더 대왕이 생각나요. 고향에 돌아가기 싫은 그 사람 마음 이해가 돼. 상처로부터 멀어지려고 안간힘을 쓰잖아요. 그는 정복자가 아니라 도망자요. 자신을 한번 들여다봐요. 약자로서 보호받다가 어느 날 거기서 벗어나야 하는 순간 우리는 대개 용수철처럼 튀어 도망가죠.”

-정복욕이 아니라 그 도망욕이 이 감독의 발전 동력이었다는 얘기 같은데요.
“영화 시나리오 쓸 때, 촬영 현장에서 밤새고 새벽 맞을 때, 말하자면 현실로부터 가장 멀리 있을 때 행복해요. 피곤해 눈은 따끔거리고 몸은 후줄근해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생생하죠. 내가 해 온 영화도 같은 맥락이라. 대중과 만나기보다 거꾸로 가는 것 말이에요. ‘황산벌’은 전복적 사고를 바탕으로 했죠.

지역감정의 뿌리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고민하다가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버린 거지. 전라도 사투리 쓰는 계백, 경상도 사투리의 김유신, 거기에 충청도 사투리의 의자왕이 등장하고 ‘거시기’까지 등장하니 발칙하다 안 하겠어요. 기존 가치를 뒤집어 버렸으니. ‘왕의 남자’는 혁명적이었죠. 천민 중의 천민인 광대들이 눈먼 사람의 처지에서 벗어나 진실을 바라보게 되는 놀이는 그 자체가 혁명 아닐까요.

'라디오 스타’는 유목민적 삶에 대한 향수고. ‘즐거운 인생’에 와서는 내 내면을 그냥 까 보였어요. ‘님은 먼 곳에’는 자연주의랄까. 일상이 전쟁 상황이 돼 버린 오늘 우리 내면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싶었고요. 지금 준비하고 있는 시나리오도 소설가 채만식의 1930년대 소설 ‘태평천하’가 원작이에요.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상황의 시대를 뛰어넘는 접속이랄까. 상업영화 하면서 관객이 원하는 트렌드를 외면하니 좀 지치긴 하네요. 오기로 더 밀고 갈까, 흐름을 따라 옷을 갈아입어야 할까 딜레마예요.”

‘철들지 말자’는 오기로 뭉친 삶
-이 감독은 자기 영화 보면서 울기로 유명하잖아요.
“눈물이 저절로 흐르는데 어떡해. 영화는 감독 자신이 무의식의 고백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 영화 속에는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이준익이 살아온 흔적이 담겨 있어요. 체제에 대한 대안적 사고, 세대 간 갈등을 메우려는 의지, 보이지 않는 가치에 점점 둔감해져 가는 우리 삶에 대한 회한 등등이 묻혀 있어요. 요즘 우리 교육이나 생활이 행만 있고 행간은 없는 문장 같잖우. 과도하게 입력한 정보만 난무하고 텍스트의 결이 사라져 버렸어요. 시간을 누려야지 끌려가서야 되겠어요.”

-사내가 눈물을 보이는 일에 대한 창피는 안 느끼세요.
“나도 군대 갔다 오고 사회 신물·짠물 다 마시며 산전수전 징그럽게 겪은 남자요. 옛날에는 ‘대한민국 남정네가 이러면 안 되지’ 하는 안간힘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며 살고 싶어요. 삶의 가치가 돈의 가치로 바로 환전되고 비례하는 이 비정한 세상에서 남자만 안 힘들 수가 있겠어요. 내 식대로 산다는 오기는 지키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는 늘 바꾸며 살고 싶어요.

‘철들지 말자’를 내걸고 하루하루 즐겁게 소년처럼, 소녀처럼 늘 변하며. 내가 잘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잘하고 있어’ 자기 최면을 걸면서 말이죠. 자본주의가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난 요새 우리 모두가 부상병이라고 생각해요. 무기 없는 전쟁에서 엄청난 내상을 입고 신음하는 사람들 말이죠.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영화를 만들어야 할 텐데.”

-대학에서 그림 공부를 했고, 최근에는 화랑까지 냈었는데 화가와 영화감독을 오가는 비결이라면.
“요새도 집 구석에 방 하나 비워 놓고 매일 뭔가 주물럭거려요. 붓글씨도 쓰고 조각도 하고. 미술은 개인 작업이죠. 자기 내면을 처절하게 들여다보고 파 내려가는 거예요. 영화는 정반대로 집단 작업이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어요. 미술이 자의식 덩어리라면 영화는 다수 대중의 타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집체물이랄까. 자의식에 솔직한 미술의 열정과 그걸 객관화하는 영화의 냉정을 오가니 엎치락뒤치락 내게 남는 건 번뇌뿐입니다.”

-마음속을 휘돌고 있는 소원 같은 게 있다면.
“칭기즈칸을 소재로 한 무대 공연물을 하나 제작하고 싶어요. 아시아적 가치를 세계인이 함께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마당극을 집체적으로 키우고 현대 영화 메커니즘을 접목한 형태로 구상하고 있는데 욕심으로 끝나지 않게 또 튀어 버려야지.”

인터뷰 습격 사건이 마무리되자 그는 사진 몇 장을 후다닥 찍고 나더니 “그럼, 이만” 짧은 인사와 함께 스쿠터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 감독이 집 지키는 진돗개 이름을 ‘바람’이라 붙인 이유를 알았다. ‘참, 거시기한 인생’이란 인상이 남았다. 메이저를 조롱하며 마이너의 삶을 응원하는 변두리 리그의 이준익 감독. “영화밖엔 난 몰라”를 노래하는 이 영화공장 공장장의 좌충우돌 도망기는 계속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준익은

영화사 사장 출신 감독
갤러리 주인 해본 화가

1993년 영화 ‘키드 캅’이 데뷔작이자 고별작이 된 이준익 감독이 10년 만인 2003년 ‘황산벌’이란 낯선 제목의 영화를 들고 돌아왔을 때 충무로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영화제작사 ‘씨네월드’의 대표로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프로듀서가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겠다니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는 성공했고, 이준익 감독은 해마다 영화를 찍는 대박 스타가 됐다. 2005년 ‘왕의 남자’, 2006년 ‘라디오 스타’, 2007년 ‘즐거운 인생’, 2008년 ‘님은 먼 곳에’는 연속 히트 행진을 이어가며 한국 영화사에 신기한 이야기꾼 감독의 자리 하나를 마련했다.

 이준익씨는 1959년 태어나 세종대 회화과를 중퇴한 화가 출신 감독이다. 합동영화사 선전부장을 거치며 80년대 한국 영화 광고 시장을 마당발로 뛰던 그는 87년 ‘씨네시티’를 창업해 외화 수입과 제작을 두루 체험했다. 이때의 경험이 직관이 빛을 발하는 이 감독 영화 성격에 주춧돌이 됐다는 평가다. 독학으로 영화를 공부해서인지 “내 머리 30%, 남의 머리 70%로 영화 찍는다”고 말하는 호인이다. 제작비를 남기는 감독으로 이름날 만큼 알뜰하게 영화를 찍는 것으로 유명하다. 5급 수준의 바둑에 야구 하기를 즐긴다. 올 4월에는 종로구 재동에 ‘구마 갤러리’를 열었으나 개관기념전이 폐관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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