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유출 막아라” 암호산업 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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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옥션·하나로텔레콤·LG텔레콤·다음·네이버·GS칼텍스….

올 들어 고객의 개인정보 유출로 곤욕을 치른 기업들이다. 이들 기업은 개인 데이터를 서버에 그대로 저장하면서 피해가 컸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민등록번호 같은 것만이라도 암호화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해킹 같은 외부 침입을 막는 데만 막대한 투자를 했을 뿐 암호화하는 데는 소홀했다.

피해 기업들도 이를 알고 있다. 한 기업 관계자는 “데이터 보안의 경우 비용도 문제지만 암호화하면 검색 속도가 느려져 주저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업들이 잇따른 유출사고와 집단소송에 휘말리면서 데이터 보안에 관심을 쏟고 있다.

데이터베이스(DB) 보안 업체인 이글로벌시스템의 강희창 대표는 “정보 유출 사고가 집단소송으로 이어지면서 DB 보안에 대한 문의가 많이 온다”며 “연 250억원 규모인 국내 DB 보안시장이 앞으로는 매년 30%씩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국내 암호산업의 성장 촉진제가 될 전망이다.

◆일상에 파고든 암호 산업

암호는 원래 군사나 첩보 분야에서 발달했던 기술. 하지만 세상이 디지털·네트워크화되면서 암호는 일상적인 기술이 됐다. 암호 기능의 스마트칩이 내장된 교통카드, 음성을 부호로 바꿔 송신하는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휴대전화, e-뱅킹·온라인 쇼핑몰의 사용자 인증과 신용카드 결제 등이다. 특히 기업이 관리하는 고객 정보 등 데이터를 암호화하는 DB 보안은 최근 떠오르고 있는 암호산업 분야다.

또 서버의 자료를 휴대용 보조 기억장치인 USB를 통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기술도 나왔다. 이는 지정된 사용자만 사용할 수 있고, 데이터를 모두 암호로 저장하도록 한 것. 보안 USB업체 엘립시스의 오상호 연구실장은 “현재는 기관과 기업 중심으로 연간 200억원 규모의 시장이 형성돼 있다”며 “앞으로 개인 보안 USB 제품이 본격 출시된다면 더 급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체계적 암호 연구 서둘러야

암호를 걸고 푸는 방법을 ‘알고리듬(algorithm)’이라고 한다. 알고리듬은 주로 수학과 관련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양자암호 같은 물리학이 동원된 것도 개발됐다. 기초학문이 뛰어난 미국이 암호 분야에서 다른 나라보다 최소 15년이 앞서고 있다. 미국은 2000년까지 암호기술이 응용된 일부 제품의 해외 수출을 제한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정부와 학계·연구기관이 손잡고 2004년에 ‘아리아’라는 암호체계를 개발했다. 국제적으로 안전한 암호로 인정받았다.

문제는 암호기술 상용화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점이다. 국내 시장이 좁다 보니 암호 관련 기업들이 영세하고 원천기술에 투자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일반 기업의 보안 의식도 낮은 편이다. 여전히 사고가 터진 뒤 ‘대처하자’는 식이다.

암호는 끊임없는 연구·투자가 필요하다. 새 암호가 나오자마자 그것을 깨려는 시도가 바로 일어난다. 실제로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암호들이 속속 깨지고 있다. 암호 알고리듬은 개발된 뒤 실용화하는 데 최소 10년이 걸린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국가 차원의 암호기술 연구관리 체계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가정보원이 매년 암호 학술 논문을 공모하고 있지만 이 정도론 부족하다.

고려대 홍석희(정보경영공학) 교수는 “단기·응용 위주의 국내 환경에선 원천기술에 대한 투자가 충분하지 못하다. 국가가 주도하는 산·학·연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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