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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막사이사이賞 오웅진 꽃동네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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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어 길가에서,다리 밑에서 아무도 모르게 말없이 죽어가는 분들을 거둬 먹여주고 치료해주며 장례까지치러주는 충북 음성 꽃동네가 올해로 세워진지 20 년을 맞았다.76년 당시 32세의 젊은 사제 오웅진(吳雄鎭)신부의 오로지한 소명감으로 방 다섯칸짜리 블록집에서 시작된 꽃동네는 이제 결핵.노인.심신장애요양원과 고아의 집,그리고 자체 병원을 갖추고 경기도 가평에 같은 시설을 갖춘 글자 그대로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위한 「지상 천국」이 되었다.꽃동네는 오는 10월이면 한꺼번에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랑의 연수원을 준공,이제는 행려병자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사랑의 복음을전하는 국민정신교육도량 으로 거듭 태어난다.「아시아의 노벨상」인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위원회는 吳신부에게 막사이사이상을 수여키로 결정,작으나마 吳신부의 헌신에 고마움을 표했다.
-축하합니다.수상 소식을 듣고 감회가 새로웠겠습니다.
『부끄러움이 앞서 수락을 망설였습니다.정진석(청주교구장)주교께 말씀드렸더니 제 공로보다 72만 꽃동네 후원회원과 정부,국민이 그동안 보내준 성원에 대한 상이 아니겠느냐고 해서 받기로했습니다.막사이사이상이 아시아의 대표적 상이니 앞으로 북한 동포를 비롯해 아시아의 없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축복을 알리라는 사명을 준 것으로 알고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신부님을 보면 늘 궁금한게 있는데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그 헌신적인 자세나 불도저보다 더 센 추진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옵니까.사제로서의 소명감이 바탕이 되었겠습니다만.
『저는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못올라갔습니다.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요.선친이 살아계실 때도 가난했습니다만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몰래 우리보다 더 가난한 이웃에 곡식을 갖다 주는 걸 보고 자랐습니다.그 때문에 우리 집 쌀독은 늘 비어있었지요.
6.25때 가마니학교를 파한 후 개울물로 배를 채우고 집으로가다 참으로 비참한 광경을 봤습니다.다리 한짝이 떨어져 죽어가는 아버지와 딸이 새우 한마리를 서로 먹이려고 다투고 있었어요.어린 마음에도 사랑의 위대함이 깨우쳐졌고 저런 사람들을 위해평생을 살겠노라 결심했습니다.
가난했지만 저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배웠고 이 땅의 비극이 저를 부모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이끈 것같습니다.
특별히 남편을 잃고 저와 함께 나무장사를 하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게 한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훌륭한 분들이 대개 그렇습니다만 신부님도 어머니의 가르침이 밑거름이 되었겠군요.어머니에 대해 말씀 좀 해주시지요.
『사람은 누구나 서로에게 은혜를 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어머니 말씀을 하기 전에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말씀을 해야겠군요.제가 중학교에 못가 열등감에 빠져있던 어느날 선생님이 공책 몇 권,연필 몇 다스와 함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친 애하는 오웅진군.젊어 고생은 금으로도 못 사네.배워야 사는 거네」라며 통신강의록을 보냈습니다.그것이 제가 중학.고등과정 공부를 계속할수 있는 계기가 됐지요.
어머니는 제가 힘들어 할 때마다 태몽 이야기를 했습니다.영웅을 을러먹는 꿈을 꾸고 저를 낳았다는 거지요.영웅보다 낫다는 제 이름 웅진(雄鎭)은 그렇게 해서 지어졌습니다.어머니는 저에게 항상 영웅보다 나은 사람답게 무슨 일을 하든 끝까지 최선을다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한국사람들 이름 뜻이 얼마나 좋습니까.누구든 제 이름의 뜻만늘 새기면 세상은 확 달라질겁니다.』 -신부가 되는 과정도 남달랐다고 들었습니다.
『중앙강의록이라는 통신강의를 들으며 처음에는 정치가가 돼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했습니다.가끔 뒷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청중삼아 웅변연습도 하고 그랬지요.그 때 펜팔을 통해 김주열(金朱烈)군과 사귀게 됐어요.4.19때 경찰에게 죽 은 바로 그김주열군이지요.친구의 죽음,부정선거등 정치에 대해 환멸이 오고그랬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열린 8.15기념식장에 갔다가 오기선(吳基善)신부님이란 분이 고아들을 도운 공으로 대통령상을 받는 걸 봤어요.
나도 모르게 吳신부님 성당에 가봤더니 거기 고아원이 있더군요.아,어려운 이들을 도우려면 성직자가 되는게 낫겠구나 생각했고고교졸업 후 바로 인근 부강교회를 찾아 신부 예비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군에 입대했는데 당시 그 혹독한 군생활을 하면서도 한가지 결심을 실천했습니다.개신교회는 있는데 성당이 없어요.성당을 짓기로 했습니다.사병이 말이지요.3년여 걸린 그 공사사연은 짧게 설명이 안됩니다.짓는 도중에 폭풍우에 무 너지고 흩어진 블록을 동네사람들이 가져가 버리고.실망 끝에 김수환(金壽煥)당시 서울교구장을 찾아갔습니다.사병이 찾아오니 의아해하셨겠지요.사정을 설명하니 흔쾌히 도와주셨고 그런 곡절 끝에 축성을 하게 됐습니다.추기경께서 축성식날 저에 게 감사장을 주면서「나보다 신앙심이 더 깊은 사람에게 내가 감사장을 줄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신게 기억납니다.지금 그 곳은 문산천주교회 마지리공소로 남아있습니다.그런 연고로 추기경님은 지금도 저를 吳병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광주대건신학교에 입학해 그 후 사제의 길을 걸어왔습니다.신학교 다닐 땐 불쌍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고물상을 열기도 했습니다.』 -최귀동(崔貴童)이라는 비범한 거지 할아버지가 오늘날의 꽃동네가 있게 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요.
『76년 5월 청주 내덕동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석달 뒤 음성군무극리 무극천주교회 본당신부로 가게 됐는데 9월 어느날 해질무렵 성당 앞을 넝마를 걸친 웬 거지 할아버지가 동냥깡통을들고 지나가기에 나도 모르게 따라갔다가 태어나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광경을 목도하게 됐습니다.할아버지가 들어선 움막에는 앞을 못보거나 사지를 못쓰거나 정신장애가 있는,자신의 힘으로는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崔할아버지는 혼자 동냥을 해 그들을 먹여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런 처지에서도 남을 도울수 있는 사랑이 샘솟다니.그날 밤 한숨도 못잤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다짐해온,때로는 실천했노라 자부도 했던 불쌍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내 마음을 근본적으로 다시 바꾸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崔할아버지는 동냥도 꼭 집집이 설거지할 때만했고 돈이나 과일등은 안받았다고 합니다.주는 사람의 처지도 생각하는,정말 살아있는 성자였습니다.
긴 밤의 고뇌 끝에 얻은 가르침이 바로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였지요.
있으면 있는대로,없으면 없는대로 끝없는 사랑의 실천만이 삶에진정한 행복을 준다는 걸 다시 알고 용기가 솟았습니다.그래서 당시 갖고 있던 1천3백원으로 지금 이 자리에 블록집을 짓고 무극천 다리 밑 걸인 18명을 모셔다가 살게 한 것이 꽃동네의시작이 됐습니다.』 ***전국 병원 안가본 곳 없어 -이제는 72만명의 후원회원이 있는 큰 복지시설로 튼튼하게 뿌리내렸지만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겠습니다.김수환추기경이 후원회원 1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회원 중에는 남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많지요. 『블록 한장이라도 보태달라고 읍장.지서장.병원장.주민들집 안찾아간 데가 없어요.큰 집 지어놓으면 전국 거지들 다 찾아올텐데 당신이 책임지겠느냐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요.일일이 설득했습니다.당신과 당신 가족이 다 죽어가는 거지 인데 누가 와서 당신을 살려준다면 고맙지 않겠느냐.처지를 바꿔 생각하자고 통사정을 했습니다.지금은 음성군민들이 꽃동네가 음성의 자랑이라는 말씀을 한다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전국 병원에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8도 병원 안간 데가 없어요.환자를 데리고 가면 병원마다 「신부님,이 환자 치료가 우리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약속하세요」 이럽니다.그러니 한병원에 한사람씩 해서 전국을 돌아다녔지요.이젠 자체 병원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후원회는 81년 만들었습니다.혼자 힘으론 도저히 안돼 추기경님을 찾아갔더니 「오병장 왔나」하시면서 사인을 했지요.그 후로정말 많은 분들이 도왔습니다.지금은 수도자 3백명,장기 봉사자2백명,일일 봉사자 1천여명이 음성.가평에서 3천여명의 요양자들과 한식구가 돼 봉사합니다.후원회원 중에는 신문파는 청소년,몸을 파는 여인들도 있습니다.』 -보람에 대해 물으면 뭔가 죄짓는 질문같고,슬픈 사연들이 참으로 많았겠습니다.여기 계신 분들을 보면 표정들이 참 밝고 그런데 어째서 불행 속에서 사나 안타깝습니다.
『언젠가 어느 움막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품에 안고 나오는데 「왜들 이렇게 수고해.하루만 지나면 다 끝날텐데」 그러더군요.
죽어가면서도 남에게 피해를 안끼치겠다는 생각에서 그 말을 했어요.또 어떤 여인은 꽃동네 입구에 와 「이제 꽃동 네까지 왔으니 더 소원이 없다」며 제 품에서 숨졌습니다.
그런 것보다 보람에 대해 이야기합시다.꽃동네는 사실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가르치는 곳입니다.학교.기업체.군대등에서 정신교육.봉사를 하기 위해 많이 찾아오는데 돌아가는 그들의 얼굴이찾아올 때와 확실히 달라지는 것을 저는 분명히 보고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들어선 것이지요.이게 중요합니다.사실 꽃동네같은곳이 없어진다면 가장 좋겠지만 현실상 그렇게 안될겁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철저하게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교육받으면 절대로남의 불행을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됩니다.봉사하는 기쁨이야말로 진짜 행복이거든요.그리고 이 분들이 그렇게 불행 하다고 할 수도 없어요.세속적으로는 틀림없이 불행하지만 이 분들은 대개 시체를 내놓고 안구를 기증합니다.그동안 2천여명이 이 분들의 눈으로 새 빛을 보고 있습니다.자신들에게 별로 해준 것도 없는 사회에 가장 큰 사랑을 행복하게 실천 하고 숨져가는 겁니다.그러니 누가 더 불행한지는 하느님만이 알겁니다.』 ***사회에 가장 큰 사랑 실현 -경남 거창에 지으려는 세번째 꽃동네는 주민들 반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요.
『그분들 생각으로는 이를테면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걸 반대하는건데 반대운동이 매우 심합니다.아예 대화를 거부하고,아이들등교거부운동을 벌이고.그런데 초.중학교 도덕교과서에 꽃동네 이야기를 중심으로 봉사와 희생정신을 가르치고 있으 니 크게 모순된 일입니다.현재의 시설로는 남부지역에서 떠도는 분들을 다 받을 수가 없습니다.그분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거창 분들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빨리 다 터놓고 대화를 바랄 뿐입니다.』 꽃동네에는 현재 얻어먹을 힘이 없는 사람이 하루 3명쯤 들어오고 이틀에 3명쯤 숨져가고 있다.吳신부는 2002년 월드컵중 한 경기를 음성 꽃동네 축구장에 유치했으면 한다.후원회원 1백만명이 현재의 꿈이라며 가입전화를 신문에 내줄 것을 당부했다.서울(02)272-0101,음성(0446)879-0100,가평(0356)8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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