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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 두 개의 고궁박물관<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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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7월 5일 새로운 모습으로 개관한 베이징 고궁박물원. 하루 평균 관람객이 4만여 명이었다. 김명호 제공

수십 년간 타이베이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은 관광객들의 필수코스였다. 변두리 표구사 한번 가본 적 없는 사람들도 한 바퀴 돌고 나서 “중국의 진짜 보물들은 모두 이곳에 있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곤 했다. 중국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실물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의 기관지 ‘고궁문물(故宮文物)’을 본다는 중국인들과 “대만에 고궁박물원이 있는 한 중국은 절대 무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대만인이 많았다. “타이베이에는 유물은 있지만 고궁이 없고, 베이징에는 고궁은 있어도 유물이 없다”는 말은 상식이었다.

베이징 고궁박물원은 고궁의 맨 뒤쪽이 정문이다. 고궁 관람객들도 유물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을 들르는 경우가 별로 없다. 가본 사람들도 시계 외에는 볼 게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타이베이 고궁박물원과 비교해 어느 곳에 유물과 명품이 더 많을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박물관이다.

베이징 고궁은 15만여 점의 서화를 소장하고 있다. 세계의 공공 박물관이 소장한 중국 고대 서화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다. 타이베이 고궁은 소장한 서화 9120점 중 5425점이 베이징 고궁 소장품들이었다. 송대(宋代) 이전의 회화는 타이베이 고궁이 베이징을 압도한다. 운반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송대의 문인화 943점이 그 안에 들어 있다. 한 작품 앞에 온종일 서 있어도 지루하지 않은 명품 중의 명품들이다. 베이징 고궁은 원대 이전의 서화 730여 점 외에 판화·유화·유리화, 당(唐)·송(宋)·원(元)대 벽화, 명(明)·청(淸)대의 대형 서화 등을 소장하고 있다. 부피 때문에 이전이 불가능했다.

도자기의 경우 베이징 고궁은 35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1100여 점이 명품에 속한다. 타이베이 고궁의 소장품 2만5248점은 모두 청 황실의 소장품들이다. 송·명대의 명품과 청대의 법랑·채도의 절대 다수가 포함돼 있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의 채도와 삼국(三國),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자기는 베이징 쪽이 우세한 편이다. 청동기는 현재 남아 있는 15만여 점 중 10% 이상을 베이징 고궁이 소장하고 있다. 타이베이에는 5615점이 있다. 베이징은 선진 시대의 청동기 1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지만 산씨반(散氏盤)·모공정(毛公鼎) 등 역사적 명품은 타이베이에 있다. 공예품은 베이징의 소장품이 타이베이의 배 이상을 웃돈다. 전국시대의 옥기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고 무게 1만 근을 넘는 옥산(玉山)과 수천 근짜리 옥 덩어리들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제의 교통 수단이었던 노부(鹵簿)와 청대의 옥새를 비롯해 황제의 용포와 황후의 관복, 천문의기(天文儀器)와 시계 등도 모두 베이징 고궁에 있다.

도서와 전적은 송·원·명대의 판본을 보려면 타이베이 고궁에 가야 한다. 장정과 활자가 아름답고 시원한 송대와 원대의 판본은 현재 베이징 고궁에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모두 국가도서관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문연각(文淵閣) 사고전서(四庫全書)도 타이베이에 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왕조를 막론하고 황실은 문물을 소장하는 전통이 있었다. 어느 왕조가 멸망하면 소장했던 문물도 신왕조의 소유였다. 혁명으로 퇴위한 후에도 황제 칭호를 사용하며 고궁에 살던 푸이는 황실 소유의 문물들이 중화민국의 소유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국 유학을 꿈꾸던 푸이는 돈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고서화들을 외국 은행에 저당 잡혔다. 점점 간이 커지자 친동생과 처남에게 대대로 내려오던 보물들을 시도 때도 없이 하사해 밖으로 빼돌렸다. 또 비밀리에 여섯 차례에 걸쳐 외부로 옮겨 놓았다. 왕희지(王羲之) 부자의 진적(眞迹)과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원고,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下圖)를 비롯해 염입본(閻立本), 송(宋) 휘종(徽宗) 등의 작품이 포함된 보물들이었다. 환관과 궁녀들도 보물창고들을 털기 시작했다. 푸이가 눈치채자 창고에 불을 질러 증거를 인멸했다. 위아래 할 것 없이 정권 막판에 하는 전형적인 행동이었다. 국보 1700여 점을 푸이는 가는 곳마다 끼고 다녔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고스란히 국가에 헌납하는 바람에 지금은 베이징 고궁에 수장돼 있다. 푸이가 빼돌리지 않았더라면 타이베이 고궁에 진열돼 있을 유물들이었다. 양안 고궁박물원의 소장품을 비교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베이징 고궁의 한 부분이 타이베이 고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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