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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김정일 神性’숙청 바람 이어질 수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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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 01면

“맛 좋은 맥주를 많이 공급하고 생산을 높은 수준에서 정상화할 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공장 관리운영에서 나서는 과업과 방도를 환히 밝혀주시고 원료 보장 대책까지 세워주시였다.”

‘병상 통치’ 장기화 땐 내치·외치·경제 모두 위기

평양시 사동구역 대동강 맥주공장 입구의 화강암 비(碑)에 새겨진 내용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2년 6월 17일 방문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북한에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다녀간 곳마다 이런 비가 세워진다.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의 현지지도 내용은 신성불가침의 대상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병상에 눕게 되면 현장통치 방식은 바뀔 전망이다. 김 위원장의 회복 정도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전국을 누비며 지도하고 국내외 현안을 직접 챙기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행동 반경과 접촉 대상이 축소되는 게 불가피하다.

김 위원장은 매년 100여 차례의 현지지도를 펼쳐왔다. 이는 잇따른 경제난 속에서 무너진 사회 기강을 잡고 체제를 지키는 효과를 낳았다. 전력 생산을 늘리고, 군인들을 동원해 토지정리사업을 하고, 100㎞가 넘는 대규모 물길(수로) 공사를 하도록 독려했다.

그가 다녀온 곳은 북한 언론을 통해 ‘모범 단위’로 선전된다. 대동강 맥주공장이 현재 맥주 소비량의 50%를 생산하는 것도 김 위원장의 현지지도 덕이 컸다. 현지지도는 핵심 분야에 부족한 자원을 집중 지원하고 경제 분야의 병목 현상을 뚫는 계기가 된다.

현지지도는 권력 실세들을 한데 묶는 결속 효과를 낳는다. 김국태(간부 담당)·김기남(선전 담당) 당 비서와 장성택 당 행정부장 등 당·군·내각의 측근들이 수행하면서 김 위원장의 지시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즉각 반영한다. 현철해·박재경·이명수 등은 수행 횟수가 가장 많은 군부 핵심 인사들이다.

그래서 김 위원장의 병상 통치가 장기화하면 체제 유지는 물론 회복 기미를 보이는 북한 경제에 악재가 될 수 있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신과 같은 존재인 김 위원장의 안위는 정책 결정과 사회 안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며 “그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주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위원장을 정점으로 한 권력 체계도 재편될 수 있다. 김 위원장이 한 차례 쓰러진 경험이 있는 만큼 핵심 측근들이 민감한 내용을 거른 채 듣기 좋은 사안만 보고할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권력 실세 간에 견제와 마찰을 초래해 북핵 문제와 같은 외치(外治) 분야의 정책 타이밍을 잃기 쉽다. 이기동 국가전략연구소 남북관계실장은 “보고 왜곡 현상이 장기화하면 최고지도자의 무(無)오류성에 흠집이 나 장기적으로 체제 불안을 낳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여기에 당·정·군 책임자보다 친인척과 측근들이 위세를 떨치면 보고체계는 더욱 왜곡될 수 있다. 권력 투쟁이 격화되면 숙청 바람이 주기적으로 몰아치는 게 사회주의 체제의 특징이다. 병상통치를 한 스탈린 시대의 소련이 그랬다. ‘1인 통치 체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선 체제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전현준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남북 간, 북·미 간 관계가 꼬여 있는 현실에서 김 위원장의 결단이 늦어지면 대외 부문에서도 속도 조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결국 김 위원장은 권력의 상당 부분을 심복들에게 위임할 가능성이 크다. 최고통치기구로 자리잡은 국방위원회 멤버들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다.

북한 주민들의 동요가 커지면 핵심 세력들은 내부통제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이란 이름을 언급하기조차 어려워한다. 김 위원장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금기사항이다. 그러나 앞으로 김 위원장의 행사 참석 횟수가 줄어들고 병색이 뚜렷해지면 체제를 위협하는 유언비어들이 급속히 확산될 수 있다. 정권수립 60주년 중앙보고대회(8일)에서 북한 5대 권력기관의 ‘축하문’을 충성서약으로 해석하고 최근 단체별로 충성서약을 받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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