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음란문화가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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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74세의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11세짜리 초등학교 여학생을회사원.대학생을 포함한 마을 주민 14명이 3개월동안 23차례나 성폭행 했고,그 때문에 농약을 먹은 피해자는 7일째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기사는 읽는 사람의 피를 거꾸로 솟게 한다.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썼다면 어떻게 의지할 곳 없고 저항할 힘이 없는 철부지를 색욕충족의 도구로 삼을 수 있으며,어린 생명 하나를 어쩌면 그렇게 잔인하게 파괴해버릴 수 있는가.우리 사회에 이런 야만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 고 인간성에 대한 믿음에 근본적인 회의가 생긴다.
우리가 월드컵을 유치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다 해서 선진사회의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다.사람이 사람대접 받고,약자가 최소한의 보호라도 받아야 문명된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14명이 23차례나 그런 야만행위를 반 복할 수 있는 사회는 결코 선진사회일 수 없다.
문제는 그렇게 비열한자들이 14명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자기의 쾌락을 위해 다른 사람의 권리를 고려하지 않는 의식구조,약자를 억압하고 이용하는 것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문화와 성(性)에 걸신들린 사람들이 늘어나는 최근의 사회 풍조를 감안하면 앞으로도 이런 사건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정의감이 가장 강해야 할 고등학생들이 병을 앓는 급우를 때리고 짓밟을 수 있고,그것에 대한 사회의 분노가 그렇게 크지 않은 분위기가이번 아산사건을 가능하게 한 한가지 요인이다.
그런데 약자에 대한 비겁한 착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전통은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도 아니고,그렇게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그러나 성적 쾌락에 대한 집착병은 이 순간 우리가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위선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우리의 전통적인 성문화는 결코 무절제한 것은 아니었다.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기본적인 생존이 어느정도 보장되고 여가가 조금씩 늘어나자 성욕을 즐기는 것이 마치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청소년들이 그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성폭행이 빈번해져 강간발생 세계 3위란 불명예를 차지하고 있고,그 가해자와 피해자 가운데 청소년들의 수가 늘어난다.얼마전 중3여학생이 학교에서 출산한 사건은 세상을 놀 라게 했으나그런 것이 반복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들에 대한 성교육이 문제의 해결인 것처럼주장하고 있다.그러나 이는 감기걸린 사람에게 기침하지 않는 약을 먹이는 것과 별 다름이 없다.성교육을 그렇게 잘 하는 미국에서도 청소년 성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고 국민학생의 임신은 다반사(茶飯事)로 일어난다.그런 피상적인 임시방편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해결은 성욕을 자극하는 음란문화를 추방해야 가능하다.대중매체.광고.영상물.잡지들이 앞다퉈 선정적인 글과 그림으로성욕을 자극하고 있고,심지어 어떤 위선자들은 예술이니,해방이니,그럴듯한 명분까지 내세우면서 청소년들의 탈선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거의 대부분 돈이란 검은 손이 움직이고 있다.돈벌이에 성을 이용하고,돈 때문에 강간과 연소자 성폭행이일어나는 것이다.아산사건은 이런 음란문화가 한 어린생명에게 얼마나 잔인한 고통을 줄 수 있는가를 웅변적으로 보 여주었다.
성욕은 인간에게 본능적이고 모든 개인은 그것을 즐길 권리가 있다.그러나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직.간접으로 해를 끼치면서 성을 즐길 권리는 없고,그것을 이용해 돈벌 권리는 더더욱 없다.우리 청소년들이 좀 더 건전하고 안전하게 자라는 것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어른들은 사회를 좀먹는 이 음란문화 제거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孫鳳鎬 서울대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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