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소돔과 고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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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화요일 방영된 SBS의 사회 고발 프로그램인 『뉴스 따라잡기』를 보면서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많은 시청자들이보았겠지만 방송의 일회성을 감안해 글로 그 기막힌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편은 이른바 「결혼 이벤트」사의 매춘 알선행위다.기자가 결혼 이벤트사에 전화를 걸어 데이트할 상대를 찾는다.소개업자는 중학생도 있고 대학생도 있는데 어느 쪽을 원하느냐고 묻는다.늦은 밤 호텔 커피숍에 대학생 차림의 여성이 나타나 자신은 돈을벌기 위해 나왔다고 말하면서 15만원을 요구한다.30대 기혼 남성이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왜 이런 곳을 찾느냐고 묻자 「새 것이 좋아서」라고 대답한다.
수요자는 남성만이 아니다.30대초 기혼녀가 전화를 걸어 데이트할 남자를 찾는다.약속한 장소에 남자가 나타나 말을 걸면 「오늘은 남편이 일찍 들어오니 내일 몇시에 만나자」며 헤어지는 장면도 나온다.
기자가 관할구청을 찾아 결혼 이벤트사의 불법행위를 따지자 규제완화로 옛날의 결혼상담소가 신고제로 바뀌었기 때문에 단속할 근거가 없고 매춘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두번째 편은 더욱 충격적이다.슬롯머신사건 이후 「빠찡꼬」업소는 이땅에서 거의 사라진줄 알았다.
그러나 24시간 성업중인 불법 빠찡꼬 업소가 서울에만 2백여개소라는 르포다.좁은 지하실의 수십대 기계앞에서 줄담배 피우며도박에 열중하는 남성들,하루에 몇천만원을 날렸다는 한숨섞인 도박꾼의 푸념,리모컨으로 조작되는 승부등 전혀 새 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기자가 인근 파출소에 불법 빠찡꼬 업소가 있다는 제보를 한다.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현장으로 떠나는 순간 파출소장은 황급히 어디론가에 전화를 건다.『김사장,지금 일제단속이 있어』하는 목소리가 방송으로 흘러나온다.단속에 나선 경찰 도 경찰차에서 내려 공중전화로 달려가 일제단속을 알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담당 젊은 검사가 기자와 문답하면서 업자.폭력조직.경찰이 트라이 앵글로 저지르고 있는 범죄행위라고 역설한다.
같은 날 밤,KBS에선 한 가정주부를 내세워 호화 외제품 상가를 돌면서 얼마나 비싼 외제 사치품이 거래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알려주는 취재현장을 소개하고 있었다.
1억원에서 10만원이 빠지는 밍크 코트가 등장한다.볼펜 한자루가 90여만원,시계 1천5백만원,침대 세트 3천여만원….누가이런 고가품을 사느냐고 취재 주부가 묻자 대체로 30대가 많고물건이 없어 못파는 형편이라고 종업원은 대답한 다.
잘 살게 되었다고 해봤자 고작 1만달러 소득시대에 한해 1백억달러가 넘는 빚을 지고 사는 어려운 나라 살림이다.나는 결코순결 지상주의 도덕론자가 아니다.좋은 물건을 소유하고 싶고 비싼 외제차도 타보고 싶은 속물에 가깝다.그래도 이건 너무하다 못해 우리가 하늘의 벌을 받지 않을까 두렵기조차 하다.
앞에 열거한 사항들은 어쩌다 우연히 드러난 부도덕과 사치의 한 단면이겠지 하고 위안하려 해도 그건 TV 외화 프로가 아닌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 하늘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연한 우리 현실이었다.
그날 점심시간 신문사 근처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는 중년신사들은 다음 대선에선 누가 유리하고 3김(金)이 어떻고 3이(李)가 어떠하며 천하대세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는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그날 3당총무들은 한자리에 앉아 「선거관련 공무원의 중립화」냐,「선거관리 단속기관의 중립화」냐는 글자 수정을 둘러싸고 승강이를 벌이다 국회개원협상이 다시 지연됐다고 했다.같은 날 대통령은 경제 관련 장관회의를 주재했고,부총리는 하 반기엔 물가안정에 경제운용의 주안점을 두겠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이 썩어가고 있는데 우리 자신,우리 위정자들은 너무나 태연하지 않은가.다리가 무너지고 가스 불기둥이 솟고 고층 백화점이 내려앉아 수많은 목숨을 잃는 하늘의 벌을 누가 자초했던가.
도박과 색욕에 눈이 어두워 소돔과 고모라의 부패를 능가하는 사회로 둔갑하면서도 불로 죄를 다스렸던 하늘의 징치(徵治)를 「창세기」의 옛 이야기로만 돌리고 있을 것인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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