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심의부터개혁하자>2.집권黨 생색내기 노골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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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재정경제원 주변에 「여당의원들은 봄에,야당의원은 가을에 바쁘다」는 말이 있다.예산확보를 위한 정치권의 로비열기가 철따라 다름을 빗댄 말이다.
여름에 바쁜 것은 집권당이다.집권당의 역점사업이 당정회의를 통해 집중 반영되기 때문이다.
지난달 24일 서울 여의도 신한국당사에서 열린 97년도 첫 예산 당정회의.이상득(李相得)정책위의장은 나웅배(羅雄培)부총리를 향해 『羅부총리도 당에 있어봐서 잘 알테니 좀 도와달라』고노골적으로 당부했다.
노태우(盧泰愚)대통령 집권후반기인 91년 9월의 일이다.최각규(崔珏圭)부총리와 민자당의 나웅배 정책위의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예산 당정회의.민자당은 당초의 입장을 뒤엎고 정부가 내놓은 33조5천50억원의 92년도 예산안을 원안 대로 수용키로 전격 결정했다.정부안은 전년도보다 23%나 늘어난 팽창예산이었다. 야당은 당연히 『92년 총선.대선을 의식한 정치 예산안』이라고 질타했다.재계도 무역수지와 물가안정을 위해서는 긴축재정을 해야 한다는 쪽이었다.여당 내부에서도 『국민의 세(稅)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은 곤란하다』며 반대입장이 팽팽했다.
그러나 민자당은 불과 10일만에 입장을 바꿨다.오히려 농어촌구조조정등 2조원의 사업비 증액요구안을 당정회의때 내놓았다.정창화(鄭昌和.경북의성).이긍규(李肯珪.충남서천)의원등 농촌출신의원들이 앞장섰다.
당시 제2정조실장이었던 서상목(徐相穆.서울 강남갑)의원은 『결국 일반 사업비를 대폭 삭감하고 농어촌 후계자 육성인원 확대등 당의 역점사업이 적극 반영됐다』고 회고했다.
여당의 무기는 국회에서의 통과다.이를 담보로 집권당의 선심성.정치성 예산이 7월부터 9월까지의 당정 협의기간중 대규모로 끼어든다.
집권당은 나름대로 논리가 있다.『경제논리를 바탕으로 사업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정부 논리대로만 하면 노인.농어촌.장애인.환경문제등 경쟁력없는 소외부문은 다 죽어야 한다는 소리나 다름없는데 이들의 이익을 정치권이 아니면 누가 대변해주 겠느냐.』(서상목의원) 『정치적 이슈의 폭로나 당리당략에 집착하는등 국회가 사실상 예산심의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개발위주로 짜인 정부안에 대해 복지.농어촌문제등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당정회의가 맡고 있다』( 金운桓의원)는 주장이다.
문제는 정부.여당의 협의과정이 지나치게 당리당략(黨利黨略)에얽매이고 지역사업도 몇몇 힘있는 정치인 위주로 배정되는데 있다. 96년도 예산안에 대한 당정회의가 열린 지난해 9월.신한국당은 정부안에 5천6백14억원을 더 얹는 조건으로 정부안에 합의했다. 3당합당 직후인 지난 91년의 백제문화권 복원사업은 거물 정치인의 이해를 반영한 대표적 사업.김종필(金鍾泌)당시 민자당최고위원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지역구인 충남부여를 중심으로 한 이 사업의 적극추진을 지시했다.결국 예결위원인 이상재(李相宰.부여)의원이 총대를 메 재경원의 반대속에 당정회의에서거액의 예산을 밀어붙였다.
정부도 당정회의를 일종의 통과의례로 여기는 분위기다.
『의원들은 국민과 접촉하며 그들이 원하는 사업을 챙긴다.이것이 정부입장과 부합되면 좋으나 그렇지 않을 때는 곤혹스럽다.그러나 당정회의를 거친 정부안은 무리가 없다고 본다.예산은 결국정치적 의견수렴의 과정이기 때문이다.』(예산실 경력 3년차의 한 국장) 당정회의는 이렇게 여당에는 집권당으로서의 프리미엄으로,정부에는 정부 예산안의 국회통과를 암묵적으로 보장받는 공식적 절차로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국회에서 토론.논의돼야할 사안이 법에도 없는 당정회의를 통해 국회밖에서 사실상 결정됨으로써 국회가 「통법부(通法府)」를 자초한다는데 있다.
이에 대해 야당인 국민회의의 김원길(金元吉)의원은 『국회로 넘어오는 정부안은 다수당이 이미 결정해놓은 정부와 다수당의 공동안』이라며 『따라서 여당의원들은 국회가 열려도 할일이 없고,야당의원들은 다리놓는 것과 같은 작은 문제들만 다 루다 끝나버린다』고 비판했다.
『의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당정회의를 없애든지,아니면 회의과정과 결과를 공개해 투명성을 높이는 쪽으로 당정회의를 개선해야 한다.』 지난해 가을 나라정책연구회가 주관한 「예산심의 과정의문제와 개선방안」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이 제시한 개선방안이다.
국회입법조사분석실 이원희(李元熙.행정학박사)연구관은 『당정회의를 공개,투명성을 높여 밀실예산이란 의혹을 없애는 일이 시급하다』며 『회의록을 작성,협의과정을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고 처방을 내놓았다.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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