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밑서 ‘핵심 인사’ 찌르는 정보형사 본능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8호 04면

퇴진 압력이 거센 가운데 어청수 경찰청장이 1일 오전 청사에서 추석 명절 종합 치안대책 수립을 위한 ‘전국 경찰 지휘부 회의’를 주재했다. 어 청장은 이날 “법치가 살아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비판 여론에 밀린다고 스스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다.”
퇴진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어청수 경찰청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 청장을 잘 알고 있는 한 전직 경찰 고위 관계자는 “청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승승장구했지만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고 그때마다 잘 헤쳐 나왔다“며 “힘든 상황에 처할수록 조용한 듯 보이지만 물밑 행보로 위기를 정면 돌파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한 현직 경찰 고위 인사는 “어 청장은 경찰 고위직에 오르기 전까지 정보통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각계 다양한 인사들과 접촉하며 의견을 청취하고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는 데 노련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난국을 헤쳐 나갈 것으로 본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위기의 남자’ 어청수 경찰청장의 처세술

어 청장의 스타일은 그의 이력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동국대를 졸업한 뒤 간부 28기로 경찰에 들어온 그는 1994년 종로서 정보과장과 이후 송파서 정보과장을 거치면서 정치권·시민단체 등 각계 인사와 자주 만나며 폭넓은 인맥을 쌓았다. 99년에는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의 지역구인 은평서장으로 부임하면서 이 의원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어 청장은 이때의 인연으로 지난 2월 총선을 앞두고 이 의원 지역구를 방문해 선거에 개입한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때 잠깐 공보업무를 맡았던 그는 2003년 4월부터 8개월간 서울경찰청에서 정보관리부장으로 일하며 자신의 주특기인 정보 분야로 되돌아왔다. 이후 2004년 경남지방청장으로 가기 전까지 청와대 치안비서관을 역임했다.

현재 어 청장은 공식 일정이나 외부 인사와의 만남을 최소화하고 경찰청 구내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있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사양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종교계와 정치권 인맥을 동원해 물밑 접촉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한 관계자는 “범불교대회를 앞둔 지난달 말 어 청장이 청와대 관계자와 만난 것으로 안다”며 “어 청장의 요청이었는지 아니면 청와대의 요구가 먼저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불교계의 분노를 잠재우고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경찰의 한 고위 인사도 “범불교대회를 불과 며칠 앞둔 어느 날 오전 어 청장이 경찰 내부 지휘 보고를 거른 채 아침 일찍 청사를 나선 것으로 아는데 청와대 인사와 만났다는 후문”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민정팀 관계자는 “어 청장이 청와대에 들어왔는지에 대해 전혀 들은 바 없다”며 “정무비서실 쪽이나 또 다른 비서실 관계자와 회동했는지도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어 청장은 여의도에도 자신의 ‘억울한’ 입장을 적극 전달하려고 애쓰는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 내 한 고위 인사는 “어 청장은 범불교 대회 직전에 국회를 출입하는 경찰 정보실 인사들과 서울 시내 모 처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다”며 “현장에서 고생하는 부하들을 격려하는 차원의 자리로 마련됐지만, 자신의 신상 문제를 설명하면서 여야 핵심 인사들과 만날 수 있도록 사전에 조율해 보라는 언급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촛불시위 폭력진압 논란으로 야당과 시민단체에서 어 청장 퇴진 목소리가 높던 7월 말 민주당 내 핵심 당직을 맡고 있는 A의원은 경찰 고위 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 인사는 “어 청장이 만나자고 한다”며 의사를 타진해 왔다. A의원은 “정치권 인사들과의 연줄을 동원해 접촉하려고 애쓰는 것 같다”며 “당시 만날 이유가 없어 거절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한 관계자도 “어 청장이 여야를 막론하고 의원들을 만날 수 있도록 의사를 타진해 보라는 지시를 정보실 관계자들에게 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런 행보는 최근에도 계속되고 있다. 어 청장은 지난 1일 국회 개원 후 사복 차림으로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실을 예고 없이 방문했고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와도 만났다. 어 청장은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 민주당 정세균 대표와도 만나기 위해 사람을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정기국회 개원일에 청장이 국회를 찾아 인사하는 것은 관행이라 다른 쪽으로 해석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보가 오해를 살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을 잘 아는 어 청장이 이런 부담을 안고서도 국회를 찾은 것은 ‘그만의 스타일’이라는 해석이다. 과거에도 어 청장은 자신의 거취 문제로 민감한 시기에 스스로 난관을 돌파한 적이 있다는 것.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한 고위 관계자의 증언.
“2007년 봄 홍영기 서울청장이 한화 김승연 회장 아들 관련 사건에 연루돼 물러났다. 후임 서울청장에는 강희락 경찰청 차장이 유력하게 거론됐다. 경찰대학장이 다른 치안정감급 자리에 비해 다소 밀리는 보직인 것도 맞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당시 경찰대학장이던 어 청장이 서울청장으로 내정되며 극적으로 부활했다. 인사를 앞두고 본인이 적극적으로 뛴 것으로 알고 있다.”

어 청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이미 지방청장을 세 번(경남청장·부산청장·경기청장)이나 역임한 경력이 있어 청와대 내부에서는 “특정 인사가 네 번이나 지방청장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서울청장으로 내정하면 특정인에 대한 특혜 논란이 있을 수 있다”며 부정적 의견이 강했다. 하지만 어 청장은 청와대 한 핵심 인사를 따로 만나 “비록 지방청장을 세 번 역임했지만 모두 짧은 기간 역임했을 뿐인데 뭐가 문제가 되느냐”며 자신이 서울청장이 돼야만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고 한다.

또 다른 청와대 고위 인사는 “여야에 관계없이 인간관계를 맺은 인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대접하고 잘 관리한다”며 “대통령에게 충성심이 강하고 우직한 것이 그의 강점이다. 그래서인지 관운도 따랐다. 이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보신’에 너무 신경을 쓴다는 오해를 받는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2004년 경남청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친형 노건평씨를 각별하게 챙긴 일은 정치권·경찰 내부에서 기정 사실인 것처럼 알려져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어 청장의 ‘저력’은 계속됐다. 올 초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두고 이택순 경찰청장의 후임이 누가 될 것인지가 큰 관심사였다. 이때도 TK(대구·경북) 출신이자 고려대 인맥인 강희락 경찰청 차장이 청장 1순위 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결국 어 청장이 다시 한 번 강 차장을 밀어내고 새 정부 초대 경찰청장 자리에 올랐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인사는 “어 청장의 직무수행 능력이나 조직 장악력에 대한 평가가 좋았다”며 “어 청장을 미는 당내 실세 인사의 역할 덕분에 청장 자리에 오른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을 위한 기도 시민연대’의 한 인사는 “평소 친분이 있는 한 경찰 관계자가 과거에도 포스터에 청장이 등장했는데 왜 어 청장만 문제 삼느냐고 억울함을 표시하더라”며 “오해를 풀기 위해 나서 달라는 물밑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최근 경찰청 불자회장 등은 각 언론사를 방문해 “경찰의 종교편향에 동의할 수 없고 청장 퇴진론도 명분 없는 주장”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어 청장이 최근 각 기관을 출입하는 경찰 정보라인을 통해 “종교차별은 오해”라는 입장을 적극 피력하도록 주문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경찰 내부의 전언이다. 어 청장은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 다시 한번 부활할 수 있을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