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현안 풀'막후人脈' 없어-새정부 출범후 끊어진채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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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81년 정부는 일본에 「안보무임승차론」을 내세워 1백억달러의 경협차관을 요구했다.일본의 안정과 번영은 한국이 북한에대한 방패막이가 돼줌으로써 가능한 것이니 그 대가를 지불하라는얘기였다.당시 전두환(全斗煥)군사정권의 취약한 정통성을 가리기위한 일종의 대(對)국민 인기전술 성격도 있었지만 어쨌든 일본의 난색으로 현해탄에 긴장이 감돌았다.이때 문제를 풀어간 것은권익현(權翊鉉)-세지마 류조(瀨島龍三)라인이다.막후채널로 가동된 權-세지마 라인은 결국 4 0억달러로 협상을 낙착시켰다.
지난 83년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당시 일 총리가취임 후 첫 해외나들이로 서울을 전격방문한 것도 權-세지마 채널의 작품이다.全 전대통령과 육사11기 동기이자 민정당대표,한.일의원연맹 회장을 거친 權씨와 일 관동군 정보 장교 출신으로전후 일 정.재계에 「신비스런」 영향력을 행사해 온 막후 실력자 세지마가 「해결사」역할을 해낸 것이다.
이렇듯 한.일간에는 공식.비공식 대화가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현안이 해결돼 왔다.평상시에는 공식적인 대화창구로 하지만 경협문제,김대중(金大中)납치사건.문세광(文世光)사건 등 민감한 현안이 있을땐 비공식 창구가 주축이 됐다.양국관계 의 특수성 때문에 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부터 인맥을 중심으로 하는이런 비공식 창구가 강조된 것이다.
일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하에서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郎).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등 내로라하는 정계거물들이 일.한의원연맹,일.한친선협회,일.한협력위원회 회장을 역임하면 서 양국관계의 일본측 인맥을 형성해 왔다.
한국측에서도 김종필(金鍾泌).정일권(丁一權).박태준(朴泰俊).이재형(李載灐).백두진(白斗鎭).신현확(申鉉碻).남덕우(南悳祐)씨등 집권자의 측근들이 유효한 비공식 대일(對日)창구가 돼왔다. 그러나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금 더이상 그런 채널은 없다.과거 대일관계에서 한국측 인맥을 형성해 왔던 대다수 인사들이상처를 입고 퇴장했다.특히 집권당의 재산공개등 사정(司正)태풍에 상당수가 흠집이 났다.문민정부가 출범하던 지난 9 3년 한햇동안 한.일의원연맹 회장은 두번이나 바뀌었다.박태준.김재순(金在淳)회장이 연이어 팽(烹)됐다.김윤환(金潤煥)의원이 회장직을 승계했지만 처지는 여의치 않은 상태다.오랜 야당생활을 한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도이 다카코(土井多 賀子)중의원의장 등주로 구(舊)사회당.민사당 쪽과 교분이 있으나 비공식 대화창구를 가동하는 일은 별로 없다.
일본쪽도 별로 다르지 않다.일 정계의 지각변동도 한.일관계의막후 채널을 무력화하는 중요한 전기가 됐다.이른바 「55년체제」라는 자민당 장기집권 신화가 지난 93년8월 무너짐으로써 일정계에 대대적인 세대교체 바람이 불었다.잇따라 터진 정치자금 스캔들도 과거 친한파(親韓派)내지 한국통으로 일컬어지던 인사들을 일선에서 밀어내는 계기가 됐다.
비공식 창구를 형성하던 인맥의 붕괴는 고도의 외교력을 양국 외무관료들에게 요구하고 있다.그러나 관료는 지켜보는 양국민의 눈초리와 정해진 방침과 규정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협상력에 한계가 있다.그러다 보니 공식적 외교채널이 꼭꼭 막혔을 때 헤쳐나갈 방법이 없을 수밖에 없다.또 정면승부식의 대결상황이 생기고 이를 피하려다 보니 미봉책을 찾기 일쑤며 독도영유권.군대위안부문제등 현안은 산적해 있다.투명한 공식채널을 통한 일처리라는 점에서 바람직하지만 그 한 계가 너무 분명하다는게 문제다.
서귀포=배명복 기자, 도쿄=김국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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