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유창혁,7단의 9단승단 50년 원칙 허문 파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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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한국바둑은 세계대회를 통해 일어섰다.국제바둑계에서 홀대를 당하던 한국은 일본과 대만이 주최한 세계대회에서 연거푸 우승컵을거머쥐면서 일거에 세계최강의 자리에 올랐다.한국이 후발주자이면서도 세계대회를 가장 많이 개최하는 나라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새로 시작되는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선수권대회」는 예선전까지 국제대결을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기존의 세계대회와 명확히 구분된다.총규모가 15억원이고 우승상금이 미화 40만달러로 세계기전 사상 최대라는 점도 인상적이지만 「오픈대회」 라는 점이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세계대회는 통상 세계 24강 또는 32강이 토너먼트로 대결한다.한.중.일 3국의 정상급 기사와 대만.미국.호주등 프로가 있는 나라의 대표가 초청된다.대회에 따라서는 유럽과 남미의 아마추어 대표가 세계 32강의 한자리를 버젓이 차지 하기도 한다.세계대회니까 구색도 맞추고 보급도 한다는 취지지만 실력의 격차가 너무 벌어지는 문제점이 있었다.알려진 스타 위주의 대회라서 신인탄생같은 의외성이 원천봉쇄되는 점,또 모든 참가선수들의항공료.숙식비 등을 주최측이 지불하는 것도 개선해야할 사항으로지목받아왔다.조훈현(曺薰鉉)9단은『한국바둑은 세계 최강이다.중.일의 프로기사들은,특히 젊은 기사들은 한국기사와의 대결을 갈망하고 있다.그런데 우리가 모든 경비를 들여 그들을 초청한다는건 어딘지 이상하다』고 말하곤 했다.
「삼성화재배 세계오픈」은 완전 오픈대회로 가는 과도기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1차예선(7월24~26일)은 한국의 1~5단 기사가 참가하고,2차예선(8월12~16일)은 한국의 6~9단및1차통과자,그리고 외국기사 24명이 참가한다.외 국기사들은 참가경비를 본인이 해결한다.이는 국제바둑대회 사상 최초의 변화다.패자는 손해를 보는 게 마땅한 프로의 법칙이 바둑계에 처음 도입되는 것이다.
2차예선 대국료는 70만원.첫판부터 떨어지면 적자고 한판을 이기면 흑자다.한달전께 기자가 만나본 중국.미국 등의 기사들은『기회만 주어진다면 적자가 문제냐』고 말하며 벌써부터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세계아마대회 챔피언과 유럽선수권 자등 2명의 아마추어에게도 참가 문호가 열렸다.역시 매우 파격적인 변화로 세계 아마바둑계에 커다란 자극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본선(9월22일~10월28일)은 32명이 토너먼트를 벌인다.
예선에서 14명이 진출하고 시드로 한국기원 7명,일본기원 5명,중국기원 4명,주최측 추천 2명이 본선에서 합류한다.준결승(10월30일)까지는 단판승부,결승(11월25~29 일)만 3번기로 치르는 짜릿한 진행이다.과거의 세계대회와 달리 우승자는 본선 시작 두달만인 11월29일 서울에서 가려진다.
최초의 세계대회는 88년4월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이 주최한 후지쓰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였다.한달후엔 대만재벌 잉창치(應昌期)씨가 최고의 상금에 4년에 한번 열리는 應씨배 세계대회를 개최,바둑올림픽이란 소리를 듣게 됐다.한국은 이 대회 에서 조훈현9단과 서봉수(徐奉洙)9단이 잇따라 우승해 중.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특히 제1회 應씨배에서 약자로 알려진 한국은 세계 32강에 曺9단 1명만이 초청되는 수모를 겪었으나 예상을뒤엎고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
이후 한국에선 기업체의 후원으로 동양증권배가 출범했고 한.중.일 3국의 국가대항전인 진로배도 뒤를 이었다.92년엔 17세의 이창호(李昌鎬)가 제3회 동양증권배에서 우승,세계대회 최연소제패의 기록을 세웠고 일본의 독무대였던 후지쓰배 에서도 유창혁(劉昌赫)이 93년 우승컵을 손에 넣었다.또 한국바둑은 93년1월부터 95년1월까지 세계대회를 연속 8회 제패해 명실공히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했다.조훈현9단은 세계 4대 기전을 석권한 유일한 인물이 됐으며,특히 5명이 출전하는 단체전인 진로배는 지금껏 한국이 독무대를 이뤘다.
이제 바둑의 중심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동했고 「이창호의 기보」는 세계 프로들의 교과서가 됐다.사실 일본은 기성전.명인전.본인방전등 규모가 10억원이 넘는 일본 3대 기전의 오픈을 주저해왔다.그러나 일본도 뭔가 변화를 도모하지 않 을 수 없을것으로 보인다.
삼성화재배와 LG배가 새로 시작되면 세계대회는 6개로 늘어나고 TV대회까지 7개가 된다.일류기사들은 더욱 바빠져 매니저를두어야한다는 얘기도 심심치않게 나오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세계대회는 지금처럼 대회기간을 6개월이나 1년까지 길게 잡지 말고 테니스의 윔블던대회나 축구의 월드컵처럼 시작해 우승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돼야 팬들의 관심과 인기를배가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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