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문화체험>보탑사 3층목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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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난 9일 오전11시.충북진천군진천읍연곡리 보련산 기슭에서 보탑사 3층목탑 준공의식이 시작됐다.새벽부터 자리잡은 사람들을헤치고 들어설 엄두가 나지 않아 이만큼 떨어진 감나무 밑에서 탑을 바라다보며 확성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 었다.
이미 3천명이 넘게 왔다는 전갈이다.줄잡아 탑 각층에 들어앉은 사람만도 1천5백명은 될 것이란다.그 소리를 듣자 갑자기 불안해진다.내가 왜 이러는가 싶다.3년여 불사를 끝낸 마당에 희열보다 불안이 앞서다니.
달인이란 평판의 태창건축 박태수씨가 설계과정에서 치밀한 구조계산을 했다.불안한 눈으로 그를 보았더니 그 정도는 끄떡없다고안심시킨다.그래도 입이 바싹 탄다.혹시나 하는 걱정이다.
30년 경력의 한옥건축 장인인 김영일씨는 1천년을 장담하며 탑을 지었다.정통기법을 전수한 도편수 조희환대목장도 다짐했었고평생을 종사한 70노객인 단청화사 한석성옹도 틀림없다고 증명한다.하긴 천년수명의 목조건물이 적지 않다.못을 쓰지 않고 짓는데는 온갖 지혜와 치밀한 마음이 총합돼야 한다.더구나 목탑은 백성들이 하늘을 향한 정성을 쌓는 것이어서 1천년을 목표로 해도 나무랄 일이 아니다.
탑 북쪽에 고구려 동명성왕 7층목탑에서 오늘의 보탑사에 이르는 계맥을 이웃나라 자료들과 함께 정리해 설명하는 「목탑」전시회를 열었다.열심히 읽으며 목탑을 익히는 분이 적지 않다.
보탑사 탑 설명에 전체높이 42.7,탑높이 32.7,상륜 10고 넓이는 1층 60평,2층 50평,3층 41평이며 목재만도8트럭 1백50대분이 소용되었다고 적혀있다.
전체높이 42.7면 현대식 고층아파트 14층과 맞먹는다.한국건물은 왜소해 보잘것 없다는 상식이 이제 난감하게 생겼다.3층이 이 정도니 황룡사 9층탑 80가 얼마나 장대하였겠는가.
우리 민족이 목탑 짓기를 시작했고,삼국시대엔 도성내에 수십의목탑들이 웅기중기 솟아있었다.조선을 개국한 태조도 한양성내 홍천사에 5층의 사리목탑을 경영했었다.임진왜란이 우리에게서 대부분의 건축을 앗아갔다.법주사 5층탑(팔상전)도 왜병이 불태운 것을 승병들이 합심해 재건한 것이다.7년전쟁으로 나라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러 전후복구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왜소해지고 말았다.
보련산 기슭에 우람한 목탑이 출현한 것은 삼국시대 이래 탑을지어온 백성들의 정성을 다시 재현한 일이며,민족긍지를 고양한 일이다. 서울성북구 미아리고개 아래 삼선포교원은 지광(志光)주지.묘순(妙洵)강사.능현(能賢)스님이 주도하는 작은 도시 포교당이다.신도라야 3천세대 정도의 비구니도량이며 강원이다.그들이보탑사를 창건했다.특별한 대시주에 의해서라기 보다 신도 들의 조그마하고 가는 힘으로 탑을 쌓아올렸다.삼선교 국시집 보련보살은 집을 잡힌 돈을 희사했다.그야말로 개미군단의 동참이었다.공사중에 방문한 문화인들도 종교에 관계없이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은 오늘의 우리문화 세우기의 3층탑에 다투어 시주해주었다.뛰어난 각 분야의 전문인들이 합세했다.그래서 탑이 완성을 보게 되었다. 1층에 새로 모신 사방불과 좌우협시 여덟분 점안식이 끝나자 참석했던 분들이 탑돌이하면서 내려오며 탑을 새긴 기념목걸이와 선물을 받는다.얼굴마다에 환희가 넘쳤고 목에 건 목걸이를다시 들여다보곤 한다.세상에 더러 이런 즐거움이 있어 야 살맛나는 인생이 아니겠는가 생각하고 있는 차에 갑자기 떠들썩한다.
아차 싶어 급히 달려가보니 3천개의 목걸이가 동나 미처 받지못한 사람들이 서운해서 지르는 소리다.
『누가 늦게 내려오랬남-.』 나도 모르게 외쳤다.혹시나 했던불안의 해소와 첫날의 성황으로 흥분이 탓이 되어 그런 외침으로표출되었나 보다.2층 법보전에 봉안할 석경(石經)제작 동참행렬을 따라가다 3층을 올려다보니 언제나처럼 미륵삼존 의 인자한 미소가 서렸고 상륜부 금색이 오늘따라 찬란하다.갑자기 반짝한다.피뢰침 끝에 박은 백금이 빛을 발했다.우리의 정성이 흠향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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