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은행 헐값 매각’ 67번째 공판 … 증인 나선 두 전직 부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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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두 명의 전직 경제부총리가 같은 재판의 증인으로 잇따라 법정에 섰다. 영국 HSBC은행의 외환은행 인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외환은행 헐값 매각 공판’에서다.

현직 국회의원인 김진표 전 경제부총리(2003년 2월~2004년 2월)와 올 5월 감사원장에서 물러난 전윤철 전 경제부총리(2002년 4월~2003년 2월). 정통 경제관료로 잔뼈가 굵은 두 사람이지만 같은 사안인데도 시각은 전혀 달랐다.

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재판장 이규진) 심리로 열린 재판에서 증인으로 선 전 전 부총리는 검찰 수사를 촉발한 감사원 감사의 지휘자답게 매각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반면 전날 증언한 김 의원은 2003년 외환은행 매각의 책임자로서 매각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엇갈리는 시각=이번 재판은 2003년 굳이 외환은행을 매각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과 이강원 전 외환은행장 등이 공모해 인수 자격이 없는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에 헐값에 넘겼다는 혐의에 대한 것이다. 우선 김 의원은 당시 경제상황에 대해 “2003년 5월부터 일시적으로 경제지표가 좋아지는 듯 보였지만 그건 위기가 잠복한 것”이라며 “2003년 내내 카드채 문제로 하루 하루가 고비였고 끝내 그해 11월에 LG카드 부실 문제가 터졌다”고 진술했다.

외환은행과 관해서는 “외환카드의 부실 문제, SK글로벌과 하이닉스반도체의 대출 부실 문제 등으로 외환은행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며 “외자 유치 등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외환은행의 부실이 전체 금융권에 큰 충격파를 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반면 전 전 부총리는 “당시 경제상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검찰이 제시한 경제지표를 보니) 경제상황이 안정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팔아야 했느냐에 대해서도 시각이 달랐다. 김 의원은 “론스타가 은행 인수자로 적합하진 않았지만 누구도 사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은행업을 지속할 전략적 투자자를 찾으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전 전 부총리는 “론스타가 서울은행 인수전에 참여했지만 하나은행에 빼앗긴 것은 시세차익을 노리는 사모펀드 특성 때문에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던 것”이라며 간접적으로 론스타의 인수 자격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했다.

◆“보고했다”vs”보고 못 받았다”=재판에 앞서 진행된 검찰 조사에서 김 의원은 “외환은행 매각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 추진된 것으로, 나는 그걸 승인해준 것”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날 재판에선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는 “외환은행의 매각, 론스타와의 수의계약 등의 결정은 변 국장의 보고를 기초로 한 것이지만 사후적으로 확인한 내용들”이라며 자신이 중요 사항을 직접 결정했음을 분명히 했다. 또 “변양호 국장이 (의사결정 권한을) 빼앗아 갔거나(편취), 관련 사실을 속였다(기망)고 생각하느냐”는 변호인 측의 질문에 “매각 결정엔 외환은행의 위급한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며 “지금도 그때의 상황 인식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전 전 부총리에 대해선 경제부총리 재직 시절 외환은행의 매각 추진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가 쟁점이 됐다. 그는 “외환은행의 자본 확충이 필요하다는 보고는 받았지만 매각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변 전 국장은 “자본 확충의 여러 대안 중 하나로 론스타가 외환은행 인수 의사를 밝혀 왔다는 사실을 구두로 보고했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서도 전 전 부총리는 “기억에 남을 만한 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1심 선고에만 2년=지난해 1월 15일 시작된 헐값 매각 사건 공판은 1년9개월째 계속되며 지금까지 67번이나 열렸다. 이것도 모자라 10여 차례의 공판이 더 진행된 뒤 이르면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선고가 내려질 전망이다. 그러나 변 전 국장이나 이강원 전 행장 등 피고인들의 정책적 결정 사항에 대해 유죄가 선고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법조계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이들이 의도적으로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넘기기 위해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을 조작했다는 등의 명확한 물증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김 의원을 증인으로 채택한 검찰 측은 당황하고 있다. 이날 검찰은 “김 의원의 신문에 위증의 소지가 많다”며 “다시 신문할 기회를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피고인에 대해 무죄가 선고될 경우 ‘론스타의 먹튀’를 제기한 일부 국회의원과 감사원·검찰은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유죄가 선고되면 매각 책임자인 기획재정부·금융감독위원회(현 금융위원회) 등이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김준현·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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