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열광은 이제 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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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는 거국일치(擧國一致)로 월드컵축구 유치활동을 벌이면서 여한(餘恨)없이 열광했다.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꼭 한국에서 열어야겠다는 열망에 일본한테는 질 수 없다는 오랜 반일(反日)감정까지 가세해 월드컵 열병을 크게 앓았다.마 치 월드컵축구에 국운(國運)이 걸리기라도 한 것같이….일본의 경우를 보면그들에게 확실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되던 지난해부터 정계.재계와언론계에서는 일본이 대승적(大乘的)입장에서 한국에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들이 공공연히 피 력됐다.한국에서 누군가가 일본에 양보를 주장했다면 어떤 일을 당했을까.
일본은 단독개최를 전제로 15개 지방자치단체가 적지 않은 규모의 유치활동경비를 분담하면서 경기장을 포함한 인프라투자를 해왔다.월드컵 특수(特需)에 대한 경제계의 기대도 컸다.특히 건설업계는 7조원 이상의 프로젝트를 예상하고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계와 언론.경제계는 공동개최 결정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월드컵축구대회가반쪽이라도 한국에서 열리게 됐다고 동시다발(同時多發)로 가무음곡(歌舞音曲)의 장이 서고 월드컵축구대회가 모든 난제(難題)를해결해주는 신통력이라도 가진 것처럼 흥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2002년까지는 앞으로 6년이 남았다.긴 시간 같지만 그 큰대회를 치를 준비를 하기에 그렇게 넉넉한 시간은 아니다.더군다나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는 일본과 직접 비교가 되는 행사다.경기장을 포함한 시설은 한국인 특유의 돌파력으 로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때까지 우리가 질서를 지키고,주위를 깨끗이 하고,외국인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소프트분야에서 일본사람들을 따라갈 수있을지 걱정이다.
88올림픽을 치른 우리다.그러나 서울올림픽은 직접 비교대상이없었다.경제적인 중진국이 그만하면 잘 했다는 평가로 만족할 수있었다.그러나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월드컵축구대회에서는 한.일(韓.日)간에 상대적인 성적이 나오 게 마련이다.1백만명 이상의 외국관객이 오고 수십억의 세계인들이 텔레비전으로지켜보는 대회임을 생각하면 마냥 승리감에 도취해 있을 형편이 아니다.우리의 정도가 지나친 열광은 일본의 자존심이 입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꼴이기도 하다.
20세기의 한.일관계는 일제(日帝)36년으로 시작된 충돌과 갈등의 역사다.한국과 일본은 과거를 만족스럽게 청산하지 않은채21세기를 맞게 됐다.이런 맥락에서 보면 월드컵축구대회의 공동개최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는 크다.한번도 건설적 인 일을 함께해본 적이 없는 두나라가 21세기를 여는 시점에 양보와 타협의정신으로 대사(大事)를 성공적으로 치러낸다면 한.일관계는 1세기만에 소중한 개선의 전기(轉機)를 맞을 것이다.
스포츠에 정치는 금기(禁忌)라고 강조들 한다.그것은 그만큼 세계적인 규모의 스포츠가 국제정치와 깊이 연계돼 있음을 의미한다.월드컵대회의 공동개최라는 것도 국제축구연맹의 유럽쪽 집행위원들이 연출한 절묘한 정치드라마가 아닌가.월드컵축 구대회의 공동개최를 통해 한.일관계가 개선되면 태평양지역의 안정에 큰 기여가 기대된다.
일단 공동개최가 결정되고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인 이상 한국과일본은 파트너다.대회의 개회식과 결승전.폐회식의 장소,이익금의분배,외국인에 대한 입국비자문제,그리고 두나라 조직위원회의 총괄등의 문제를 협의하는 어려운 과제가 남아있다 .
이 대회를 국위선양과 이권의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한쪽에 유리하면 다른쪽에 불리하다는 식의 제로 섬 게임의 발상으로는 공동개최의 상징성을 살리지 못한다.패자의 상처를 건드리는 열광을 멈추고 냉정하게 할 일을 점검할 때다.월드컵대회 이후에도 우리는 이 지역에서 일본과 이웃해 살아가야 한다.
(국제문제 대기자)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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