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감독의 신작영화 "지독한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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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이명세 감독(사진)은 한국 최고의 영상스타일리스트로 통한다.
동화적 상상력을 세트에 옮겨 아름다운 영상으로 빚어내는데 그를따를 인물이 없다.
이 때문에 일상의 미세한 무늬를 그려내는데 취약한 한국 영화계의 대안같은 존재로 각별한 주목을 받아왔다.그러나 지금까지 네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그는 『스타일은 세련됐는데 현실을 담아내는 깊이가 얕아 동화적』이라는 지적 또한 꼬리 표처럼 달고다녔다. 15일 개봉되는 『지독한 사랑』(시네2000 제작)은이 꼬리표를 완전히 떼어버릴만한 작품이다.현실에서 껴안을 대상을 찾지 못하고 동화의 세계에서 방황하던 이명세의 미학은 여기에서 임자를 만난다.「남이 하면 스캔들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유부남과 처녀의 사랑이 그것이다.일상에서 너무 흔히 볼 수 있는,그래서 상투적이기까지 한 이 소재에 감독은 특유의 동화적 상상력을 결합시켜 아름다운 한편의 산문시를 만들어낸다.
일 관계로 만난 문화부 기자 영희(강수연)와 시인이며 교수인영민(김갑수)은 첫눈에 「눈빛을 보고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느낀」관계다.둘은 곧바로 여관으로 직행해 물을 찾는 고기처럼 서로에게 다가간다.이렇게 시작된 관계지만 현실적인 문제가장벽으로 다가오면서 둘의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관계는 극단적인 양상을 보인다.영민의 주먹이 날아가고 영희는 『마누라도 이렇게패니』라며 대든다.그리고 둘은 언제 그랬느냐는듯 다시 서로를 파고 든다.만나고 술마시고 싸우 고 관계를 갖는 이 미로같은 사랑의 생태를 감독은 밑바닥까지 들여다본다.
그 지점에서 건져낸 에피소드로 영화는 이어져 간다.누가 봐도어쩌면 저렇게 일상의 리얼리티를 잘 살렸을까 감탄할 법하다.그러나 이 영화의 묘미는 시선의 산문적 구체성 자체에서 그치지 않는다. 감독은 아픈 현실을 드러내면서도 아름다운 시적 이미지로 이를 감싸안음으로써 논리적이고 수사가 풍부한 세련된 영상언어를 구사한다.예컨대 이런 대목이다.겨울방학에 두 남녀가 비밀리에 차린 다대포 해안의 신방은 오랫동안 비워둔 빈방이다 .
이곳에서 그들은 꿈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한편으론 더 격심하게다툰다.천당과 지옥을 무시로 오가는 이들의 일상을 감독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이들이 화면에서 사라지는 순간 감독의 시선은 얼른 소품에 가 닿는다.평화롭게 김을 피워올리는 주전자,뜨거운 물이 가득 채워지는 보라색 물컵,서서히 달아오르는 전구의 필라멘트가클로즈업 된다.두 남녀가 놓여 있는 깨지기 쉬운 행복의 이미지를 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산문적 서사와 시적 이미지가 상호보완적으로 연결되는 긴장을 유지한다.4분에 걸친 마지막의 정사신은 이같은 매력포인트를 선명하게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이별을 예감한 두 남녀의 몸짓은 격하지만 슬프고,화면은 동선이 크지만 흑백으로 표백돼 있다.삽입된 음악 『봄날은 간다』도애절하지만 재즈풍으로 편곡돼 한걸음 뒤에서 들리는 듯하다.『내자궁속에 그대 주검을 묻듯/그대 자궁속에 내 주검을 묻네』라고노래했던 시인 채호기의 지독한 사랑이 지독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카메라워크가 왕자웨이(王家衛)를 방불케 한다.
남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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