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 예정대로 계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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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북한의 핵시설 불능화 중단 조치에도 불구하고 기존 6자회담 합의에 따른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을 예정대로 계속할 방침이라고 27일 밝혔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의 불능화 작업 중단이 장기화되거나 추가로 사태가 악화되지 않는 한 6자회담 참가국들이 중유 100만t 상당의 에너지를 제공키로 한 합의사항은 계속 이행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이어 “우리 정부는 미국·중국·러시아 등 다른 공여국들과도 긴밀히 협조해 보조를 맞출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보호 장구를 착용한 외국 기자들이 지난 2월 북한 영변 원자로를 둘러보고 있다. 북한은 당시 핵시설 불능화 약속을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외국 언론에 처음으로 영변 주 원자로를 공개했다. [영변 AP=연합뉴스]

정부의 이 같은 방침은 북한의 불능화 조치에 맞춰 즉각 에너지 지원을 중단할 경우 더욱 사태가 악화되고 10·3 합의 등 힘들게 이뤄낸 6자회담의 기존 합의사항까지 백지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6자회담의 하위 조직인 경제·에너지 실무그룹의 의장국이다. 또 그 배경에는 북한의 불능화 중단 조치에 담긴 의도가 6자회담 틀을 깨려고 하기보다는 구체적인 검증 방안을 확정 짓는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압박용 전술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는 정세 판단이 깔려 있다. 정부 고위 당국자가 26일 북한의 성명발표 직후 “미국과 중국 등 관련국들과 대응책을 이미 충분히 협의했다”며 “과잉 반응을 할 필요는 없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이다.

따라서 북한과 접촉 고리를 유지하고 불능화 작업 재개를 촉구하면서 한편으로는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판단이다. 정부는 지난 주말 에너지 지원과 관련한 실무 협의를 위한 접촉을 북한에 제의해 둔 상태다.

하지만 북한의 불능화 중단이 장기화되거나 외무성 대변인 성명에서 밝힌 것처럼 ‘원상회복’ 조치에 착수할 경우에는 에너지 지원에도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강조하는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에너지 지원과 불능화는 상호 연계된 사항”이라며 “당분간은 지원을 계속하지만 북한이 불능화 약속을 이행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명확해지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6자회담 참가국들은 지난해 10·3 합의에서 북한이 비핵화 2단계로 영변 핵시설을 불능화하는 대가로 중유 100만t 상당의 에너지를 분담해 지원키로 합의했다. 7월 베이징에서 열린 6자 수석대표 회담에서는 10월 말까지 에너지 지원을 마무리 짓기로 하고 이를 언론발표문에 명기했다. 이에 따라 20만t 상당의 지원 의무를 안게 된 한국 정부는 초기에 지원한 중유 5만t과 각종 설비·자재 등 모두 12만8000t 상당의 지원을 완료했다. 정부 당국은 합의된 지원분 가운데 아직 북측에 전달되지 않은 자동용접강관 3000t을 마련하기 위한 국내 조달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북한은 이전에도 에너지 지원의 진척 상황과 연계해 불능화 작업 속도를 늦춘 적이 있다. 북한은 지난해 12월 에너지 지원 속도가 부진하다는 점을 구실로 당시 3교대로 진행해 오던 폐연료봉 인출 작업의 속도를 하루 8시간씩 작업하고 30여 개씩만 인출하는 것으로 크게 떨어뜨렸다. 그러던 중 미국이 테러지원국 해제를 연기한 직후인 14일부터 연료봉 인출 작업을 완전 중단했다. 현재는 영변의 5MW 원자로에 장전했던 연료봉 8000개 가운데 4800여 개를 뽑아내 수조에 보관하고 있는 상태다.

이와 별도로 미사용 연료봉을 폐기하거나 북한 외부로 반출하는 작업 및 원자로의 제어봉을 제거하는 작업이 아직 11개 불능화 조치 가운데 이행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한편 핵 문제에 정통한 정부 소식통은 “북한이 성명에서 원상회복 조치를 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이미 냉각탑을 폭파하고 불능화가 상당히 진행돼 1년 이내에 회복하기는 어렵다”고 예상했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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