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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이 석가탄신일에 띄운 '중생의 노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청춘의 대부분을 산중 승려로 보내고 『만다라』를 시작으로 소설가의 길을 걷고 있는 유발승(有髮僧) 김성동(金聖東.사진)씨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과학과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그리하여 섭리의 생태계가 무너져가는 이 시대에 불교의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되던지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註] 애홉다.일찍이 보리(菩提)의 아름다운 마음을 내어 부처를 이루고자 했으나 업(業)이었던가.욕계화택(欲界火宅)의 온갖 선악과 미추와 시비를 짯짯이 살펴보면서 콩팥이 새삼륙으로 시시콜콜 잔소리나 늘어놓고 그 잔소리의 품삯을 받아 추한목숨을 부지하는 잔소리꾼이 되고 만 자의 가슴속에 어찌 또 만가지의 감회가 없으랴.
참으로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들 말한다.이렇게 편리하고 풍요로운「컴퓨터세상」을 못보고 죽은 예전 사람들은 불쌍하다고도 말들한다.그렇다.손쉽고 편리한 것만으로 본다면 분명히 살기 좋은 세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절대빈곤은 사라졌다지만 사람들은 허기진영혼을 채울 양식이 없어 비틀거리고 있고 지구 최후의 분단체제는 아직도 완강하며 무엇보다 마음놓고 숨을 쉬고,마음놓고 물을마시고,마음놓고 밥을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 른 지 벌써 오래다. 무릇 꿈과 환상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라는 이름의 중생(衆生)일 것이다.꿈과 환상을 걷어내버린 냉혹한 현실의 현장이야말로 세계의 참모습이며 진리의 본디자리라는 것은 깨달음을얻은 이들의 법어(法語)일 것이고,거지반의 중생은 꿈 과 환상속에서 살아가게 마련이다.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꿈과 환상이 깨져가는 과정인 것이며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그리하여 세상이 재미없다고들 한다.적어도 땅을 어머니로 알고 살았던 농본주의시대까지는 그러했다.
그런 생각 또한 이제는 할 수조차 없게 됐으니 모든 것들이 남김없이 까발려지고 있기 때문이다.꿈도 없고 환상도 없으며 신비로운 비밀의 세계도 없으니 희망 또한 있을 수 없다.인간이라는 이름의 중생은 마침내 「단백질의 최고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된 마당에 무슨 꿈이 있고 희망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스산하면서 참으로 모골이 송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돈인가.돈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것을 결정하는 자본주의만이 남는가.
「컴퓨터」와 「유전공학」으로 대표되는 「과학」만이 남는가.중생은 이른바 과학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줄 것으로 굳게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그 과학은 이제 중생의 하나일 뿐인 인간의 손으로 또다른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지경에 와 있다.
무릇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중생의 업력(業力)에의해만들어져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윤회(輪廻)를 되풀이하게 마련이니 깨달음을 얻어 그 윤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쳐온것이 불교였다.
그런데 이른바 「DNA」의 가공할 육박 앞에서 업이며 윤회가살아남을 수 있는 것인지.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영원불멸하고 오묘불가사의한 절대적 「그 무엇」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생명」까지가 하나의「정보」로 규정되고 그 정보의 집합과 이동이며 조립에 의해 만들어진다면 이런 경천동지할 상황에서 불교는 무슨 대답을 하고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인지.일체중생의 일체번뇌에 대해 막힘없이 대답해 주고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을 때만이 진리라고 할 수 있다면 더구나 그러하다.
망상(妄想)인가.산마다,골마다 범종소리 울려퍼지고 욕망의 꼬리표를 매어단 연등빛 눈부신 초파일에 미망(迷妄).「마음」은 분명 하나이겠으되 그 하나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돼 백천가지를 넘어 팔만사천가지로 가지를 뻗고 새끼를 쳐 마침내 그 본디 자리인 한마음까지를 갈가리 찢어발기고야 마는 번뇌망상.손잡이 없는표주박으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온갖 번뇌망상을 퍼마시던 경허선사(鏡虛禪師)의 노랫소리에 눈물만 흐른다.
「흰 구름아 너는 왜 날이면 날마다 산으로만 날아가니 세상이그렇게도 더럽거든 나를 좇아 이곳으로 돌아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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