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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 위해 쓸 곳은 늘고, 나라 곳간은 비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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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 04면

지난 18일 이희수 기획재정부 세제실장이 국제통화기금(IMF) 상임이사에 내정됐다. 감세에 초점을 맞춘 세제개편안의 실무 책임자가 5개월 만에 교체된 것이다. 며칠 뒤, 대기업을 대상에서 제외한 법인세 인하안이 정부와 한나라당에서 흘러나왔다. 당정협의와 국무회의까지 거친 정책을 뒤집었다는 불만이 재계를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이런 가운데 25일 발표 예정이던 세제개편안은 다음달 초로 미뤄졌다.

스텝 꼬인 감세 정책

이명박 정부의 감세 정책에 이상 기류가 흐르고 있다. 국가경쟁력 강화와 성장기반 확충이라는 당초 취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지역구와 표를 의식한 선심성 정책으로 흐르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여당 의원과 지도부, 정부 사이의 엇박자도 심각하다.

작은 정부 사라진 게 화근
새 정부가 누누이 강조해 온 것은 감세와 짝을 이루는 ‘작은 정부’였다. 정부가 씀씀이를 줄이는 만큼 세금도 덜 걷겠다는 거였다. 그러나 정부가 이곳저곳에 돈을 쓰겠다는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덜 걷어 덜 쓰는’ 데에서 ‘걷을 만큼 거둬 쓸 만큼 쓰는’ 것으로 재정 운용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당연히 감세정책의 스텝도 꼬이게 된 셈이다.

법인세가 대표적이다. 이명박 정부는 6월 초 법인세 최고세율을 2010년까지 25%에서 20%로 낮추고 최저세율은 13%에서 10%로 내리기로 했었다. 최고세율은 대기업, 최저세율은 중소기업에 주로 적용된다. 정부는 5년간 8조7000억원의 감세 효과가 발생해 대기업 투자와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란 설명을 했다.

하지만 일단 대기업을 대상에서 빼면서 감세 효과는 3000억원에 불과하게 됐다. 나머지 8조4000억원은 택시 5만 대 감차 지원(1조5000억원) 등 민생 지원과 유가 대책 등에 투입한다.

최근 기획재정부가 집계한 각 부처의 내년도 예산 요구안은 모두 276조2000억원으로 올해보다 8.4% 증가했다. 각 부처는 각종 명목으로 공기업이나 민간 부문을 지원하는 방안을 앞다퉈 마련 중이다. 지식경제부는 한전과 가스공사에 상반기 요금 동결에 따른 적자의 절반인 1조2550억원을 추경예산을 통해 지원키로 했다. 한국외국어대 임기영(경제학) 교수는 “국방 등 경직성 예산의 비중이 높은 한국의 예산 특성상 정부가 단단히 각오하기 전에는 씀씀이를 줄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감세의 전제가 흐트러진 만큼 일방적으로 감세를 밀어붙이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자칫 국가 부채만 부풀려 후손에게 큰 짐으로 물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일관성·논리 부족
감세 방향도 오락가락하고 있다. 정부는 당초 법인세와 부동산 세제 등 대기업과 부유층 위주의 감세를 추진했다. “법인세를 내리면 투자나 배당을 통해 협력업체 근로자와 자영업자에게까지 효과가 전파된다”(강만수 재정부 장관)는 논리였다. 한나라당 민생특위는 고가주택 보유자와 1가구 다주택자에 대한 부동산 세제 완화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물가와 촛불시위 등으로 민심이반이 심해지자 ‘중산층과 서민 지원’으로 방향이 급선회됐다. 생필품에 대한 부가세 폐지와 중소기업 위주의 법인세 인하 등이 그것이다.

고려대 이장혁(경영학) 교수는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논리적인 설명을 내놓아야 하는데 오락가락하는 모습만 보이면서 감세가 장기적인 국가 경영 전략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재민 연세대 교수는 “한국의 실질 조세부담률은 1970년대 선진국보다 훨씬 낮아 감세를 통한 소비 진작이 서민층에 이익이 될 가능성은 작다”며 “감세를 경기 대책이 아니라 일자리 창출과 양극화 극복이라는 중장기적 과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01년 이후 상위 소득 20% 계층의 소비 증가가 하위 계층의 소비를 끌어올리는 효과는 이전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96년부터 2000년까지 상위 계층이 소비를 100원 늘리면 3개월 뒤 하위 계층 소비가 60원 늘어났지만 2001년 이후엔 22원에 머물렀다. 상위 계층이 늘어난 소득보다 훨씬 많은 돈을 유학 자녀에 대한 송금과 여행 경비, 수입품 구입 등으로 해외에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법인세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란이 있다. 증권사들은 법인세 인하로 가장 큰 혜택을 볼 업종으로 시중 은행과 제약업종, 일부 우량 대기업 등을 꼽고 있다. 외국계 회사가 많거나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곳들이다. 마땅히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감세로 생긴 여윳돈이 대부분 외국인 주주들의 손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출 위주의 대기업 투자 확대가 내수에 미치는 효과도 예전보다 현저히 떨어진 상태다. 현정택 한국개발연구원장은 “경제적 고통이 집중되는 계층을 중심으로 소득 보전 차원의 재정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업도 고통 분담 차원에서 감세가 늦어지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재정 악화 우려 커져
대기업에 대한 법인세 인하 유보는 그동안 ‘나라 곳간은 넉넉하다’고 해온 정부와 여당의 설명을 무색하게 했다. 이미 발표한 감세안도 이행하지 못할 만큼 재정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은 감세 재원으로 쓰고 남은 세금(세계잉여금)을 꼽아 왔다. 하지만 정부가 지난 6월 고유가 대책으로 10조4000억여원을 풀기로 하면서 지난해 잉여금 4조9000억원은 이미 바닥이 드러났다. 추가적인 감세엔 새로운 돈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재정부는 이를 해마다 7조원가량으로 예상되는 초과세수로 감당하겠다고 해왔다. 하지만 감세안이 쏟아지면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소득세율 1%포인트 인하는 연 1조7000억원, 종부세법 개정안은 1조2000억원짜리다.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발표했거나 추진 중인 감세 방안이 모두 현실화되면 총 16조∼17조원에 이르는 세금이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2월 인수위가 연 6% 경제성장을 전제로 5년간 감세 여력이 11조원가량이라고 분석했던 것과 차이가 크다. 임기영 교수는 “무리한 감세는 재정 적자를 불러오고 이는 국가 부채나 증세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며 “각종 공제 및 감면 혜택을 줄이는 한편 자본이득세 등을 도입해 공평 과세와 세원 확대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선진국에선 법인세를 낮추더라도 주주들에게 자본이득으로 돌아가는 몫을 다시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장치가 마련돼 세수 감소가 크지 않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주식 매매 차익에 비과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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