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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10대>13.벽속의 아이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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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0일 오후11시.학원에서 돌아온 서울 P고 3년 朴모(18.서울송파구마천동)군은 자기방 책상에 앉자마자 컴퓨터 전원버튼부터 누른다.익숙한 손놀림으로 대화방에 들어간 朴군은 모처럼 「좋은 말벗」을 만나 꼬박 밤을 새우고 말았다.
『엄마.아빠는 매번 좋은 대학 못가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만해서 싫고….매일 얼굴을 맞대는 학교 친구들도 경쟁상대잖아요.
솔직히 걔들하고는 무슨말을 해도 싫어요.차라리 얼굴은 몰라도 대화방 애들은 부담도 없고 편해요.』 반에서 2~3등으로 모범생인 尹모(16.S고2)군은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비밀스런 세계가 있다.입시에 대한 중압감을 떨치지 못해 「정신이 맑아진다는」 감기약에 손댄지 벌써 6개월.
『처음엔 시험이 닥쳐 머리가 아프면 한두알씩 집어넣었는데….
지금은 없으면 하루도 못버티겠어요.그래도 뭐 어때요.아직까진 엄마.아빠,그리고 선생님에게서 좋은 애란 소릴 듣는데요 뭐.』청소년폭력예방재단 조명현(曺明鉉)사무국장은 최근 들어 다른 나라에선 사례를 찾기 어려운 새로운 학내폭력을 호소하는 아이들로고민이 많다.바로 돈이나 위세가 목적이 아닌 물리적 폭력으로 숙제나 시험정보 등을 요구하는 이른바 「성적 강탈자」들 때문이다. 『공부요? 돈버는 것,지금보다 조금 낫게 사는 것,그런 것조차 관심없어요.』 초등학교 6학년때 가출,절도와 본드에 빠졌다 경찰에 붙잡힌 金모(16.D여중3년 자퇴)양은 체념인지,달관인지 담담한 태도로 『집은 물론 숨막히기만한 학교에선 정붙일 구석이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金양처럼 무작정 가출한 10대들이 올 3월말까지만 무려 3천5백50여명에 이른다.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정도나 늘어난숫자다.하지만 입시가 전부인 경쟁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비하면 가출 등의 비행은 그나 마 다행인 사례. 『곧 중3이 된다.입시를 생각하면 살기가 싫다.죽으면 내혼을 떠돌게 해 TV에 나오는 것같은 모험을 하겠다.예전에 본영화 「비틀주스」처럼 다른 세계로 갈 수 있게….』 지난 2월4일 경기도시흥시 T아파트 뒷산에서 같은반 친구 洪모(15)양과 함께 극약을 먹고 목숨을 끊은 朴모(15)양이 남긴 유서의일부다.『비틀주스』는 자동차사고로 숨진 부부의 영혼이 자유롭게세상을 돌아다닌다는 내용을 담은 영 화.최근 YMCA에선 청소년들의 자살실태와 관련된 조사를 했다 결과가 너무나 의외여서 발표를 놓고 며칠간 고민해야 했다.청소년 10명중 무려 7명이자살충동을 느낀 적이 있고 그중 10명에 1명꼴로 실제 자해한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자살을 생각하게된 동기의60%이상은 진학및 성적문제였다.신10대들도 이 중압감에서만큼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들은 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그 중압감에서 벗어나려고한다.또래 친구들과 함께 고민하던 80년대의 10대들과는 달리컴퓨터상의 사이버공간이나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하는 방법을 즐긴다는 것이다.이같은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사 회가 개인주의화되는데 따른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진단한다.핵가족아래에서 형제없이 자란 탓에 문제해결 방식 역시 집단간의 유대감보다 개인적인만족에서 찾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여가시간에도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는 「나홀로 방(房) 문화」가 보편적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방을 가도 친구의 노래조차 듣기 싫을 때가 있어요.그럴 때면 내 컴퓨터의 노래방 기능을 이용해 혼자노래부르죠.』(H중 3년 金모군) 그러나 이같은 홀로서기는 때론 쉽게 자포자기해버릴 위험성도 안고 있다.서울대 심리학과 원호택(元鎬澤)교수는 『자아의식이 강하고 기대수준이 높을수록 스스로의 기대치를 획득하지 못했을 때 좌절하기 쉽다』며 『특히 좋은 친구들이나 가족 과의 감정적인 교류가 부족하면 자폐나 자살등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최근 10대들에겐 진학관과 직업관에서 이전세대에선 볼수 없던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무엇보다 입시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찾으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전국 1백52개 전문대의 평균 경쟁률은 94년 2 .74대1에서95년 3.79대1,96년 5.5대1까지 상승했다.D공전의 경우 96년 특차 합격자중 무려 84.5%가 내신 1등급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Y고 3학년 담임 정민호(鄭旻昊.43)교사는 『요즘은 성적이좋은 학생들 중에서도 예술을 하겠다거나 적성에 맞는 전문분야를선택하겠다는 경우가 적지않아 진로 지도에 애를 먹는다』고 말했다. 이렇듯 「대학=4년제」라는 등식이 깨지고 있는 것은 고용구조와 사회전반의 직업관 변화가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4년제 졸업이 구직의 보증수표로 연결되던 고정 패턴에 변화가 왔을 뿐더러 학력파괴 현상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아직까지 신세대들의 홀로서기가 쉽지 않은 게 우리 사회및 가정의 분위기다.
하루 20건 정도 전화상담을 하는 YMCA 진로진학상담실 윤정혜(尹貞惠.33.여)씨는 『입시를 포기하고 새로운 진로를 결정하도록 설득하지만 직업교육에 대한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실정』이라며 『사회.가정의 분위기 변화와 함께 체계 적인 직업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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