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일본어 자막 전문가 네모토 리에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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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요즘 일본에선 한국 영화의 바람이 거세다. 아는 일본인들이 오는 6월 일본에서 개봉할 예정인 '실미도'의 비디오 테이프를 미리 좀 구해달라고 부탁할 정도다. 지난해에는 모두 14편의 한국 영화가 일본 극장에서 상영됐다. 올해는 이미 23편이 상영됐거나 상영될 예정이다. '쉬리'(관객 125만여명).'JSA'(80만여명)는 대표적인 성공작이다. 방송드라마 '겨울 연가'가 '겨울 소나타'란 이름으로 TV에서 방영돼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한국 영상문화에 대한 인식도 크게 높아졌다.

도쿄(東京)대.주오(中央)대.방송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네모토 리에(根本理惠.39)교수는 이런 변화가 있게 한 숨은 주역이다. 1991년 이후 일본에서 상영된 '쉬리' 'JSA' '살인의 추억' '태극기 휘날리며' '엽기적인 그녀' '무사' 등 한국 영화 150여편 대부분의 일본어 자막이 그에 의해 만들어졌다. '실미도' 도 마찬가지다. 소설책 '엽기적인 그녀'의 일본어판(2003년)을 냈고, '겨울연가'시나리오를 일본어로 완역(문고판 4권)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지난 19일 도쿄의 한 식당에서 네모토 교수를 만났다. 그는 "고1 때 재일동포 2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중학생이 자살한 사건을 다룬 방송 드라마 '나는 12살이다'를 본 후 한국어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오사카(大阪)외국어대 한국어과에 입학해 한국어를 공부했다. 대학원에서 한국 근대문학을 전공한 뒤 한국에 가 2년6개월간 생활(고려대 유학.연세대 어학당 강사)했다.

그는 "91년 NHK 교육방송이 방영한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의 자막을 번역한 것이 첫 작업이었다"며 "당시는 한국 영화의 극장 개봉을 꿈도 못꿨는데 그동안 너무 변했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가 붐을 이루는 이유에 대해 그는 "한국 영화의 질적 수준이 높아진 데다 월드컵 이후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라며 "386세대 감독들의 영화는 소재가 다양하고 개성.창의성이 두드러지며 촬영 기법도 뛰어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살인의 추억'에 대해 "일본 영화 전문가들이 텍스트로 삼을 정도의 수작"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한국 영화의 일본어 자막을 보면 대사를 100% 전달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감정 표현의 주요 수단인 '욕'이 거의 옮겨지지 않아 싱거울 때도 있다. 기껏해야 바보란 뜻의 '바카'(馬鹿)정도다. 네모토 교수는 이와 관련, "일본어 자체에 욕설이 적어 적합한 말로 옮기기도 어렵지만 일본 영화윤리위원회의 기준이 갈수록 엄격해져 신체와 관련한 욕은 물론 '미친 ×' '정신이상자' 등의 표현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말은 발음이 너무 아름다워 듣고 있노라면 기분이 좋아진다"며 한국인보다 더한 한글 사랑을 표현한 네모토 교수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내 이야기보다 한국 영화 이야기를 더 많이 써달라"고 주문했다.

도쿄=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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