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신냉전시대 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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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보루인 미국의 승리로 20세기 냉전은 끝났다는 믿음은 과연 옳은 것인가. 냉전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사그라들었던 것뿐 아닐까. 민주주의로 포장한 권위적 패권국가 러시아의 부활과 함께 21세기의 새로운 냉전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세계는 불안한 눈으로 그루지야 사태의 전개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러시아와 그루지야가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일주일 가까이 계속된 그루지야의 포성은 일단 멈췄다. 하지만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군의 그루지야 철군은 지지부진하다. 미국은 인도적 지원을 명분으로 공군력을 그루지야에 투입하고, 20개월 가까이 끌어온 폴란드와의 미사일방어(MD)체제 설치 협정을 전격 타결하는 등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강화 중이다. 러시아는 폴란드에 대한 무력개입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 등 옛 소련권 국가들은 친서방 노선을 가속화하고 있다. 동유럽과 옛 소련권에 긴장이 고조되면서 새로운 대결구도가 형성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자치공화국인 남(南)오세티야를 그루지야가 공격한 것이지만 남오세티야의 러시아 시민권자 보호를 핑계로 러시아가 과도한 무력개입에 나서면서 전쟁으로 비화했다. 막대한 오일머니를 배경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회복하고, 옛 소련의 영광을 재현할 기회를 엿보던 러시아의 상왕(上王)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에게는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러시아는 그루지야에 대한 강력한 무력개입을 통해 자신의 세력 범위에서 이탈하려는 시도와 옛 소련권에서 자신의 패권을 위협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과시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발목이 묶여 있고, 이란 핵 문제에서 러시아의 협조가 필요한 미국으로서는 러시아와의 무력충돌 위험을 무릅쓰기 어렵다. 러시아에 천연가스를 의존하고 있는 유럽국들의 대응도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냉전이 끝나면서 유일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제국(帝國)을 방불케 하는 일방주의적 행태로 패권을 과시했다. 이라크 침공에서 보듯 유엔 등 국제기구와 국제여론을 무시했다. 러시아의 반대를 무릅쓰고 옛 소련권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확장하고, 체코와 폴란드에 미사일방어 체제 구축을 추진했다. 이란을 표적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러시아는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 코소보 독립을 가장 먼저 인정함으로써 분리독립을 추진하는 그루지야 내 자치공화국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독립에 반대할 명분을 상실하는 우를 범했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 중국의 선택과 진로가 신냉전 구도에 어떤 파장을 몰고올지도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냉전적 패권주의의 부활은 인류 모두에게 불행이다. 힘을 갖추면 사용하기 마련이라고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힘의 질서 변화가 한반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의식은 하고 있는 것인가. 정신을 똑바로 차릴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