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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가정폭력'은 범죄행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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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남편에게 매맞고 사는 딸의 기구한 삶을 보다못해 사위를 살해한 어머니.어머니 대신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수해 17일동안 옥살이했던 딸.
『내가 진범』이라며 서로 살인혐의를 뒤집어쓰려 했던 「비운의모녀사건」은 새삼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짐승같은 사위의폭력 앞에서 딸을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모성은 살인을 택했다.그래서 어머니는 가해자가 돼 쇠고랑을 차야 했다.무엇이 연약한 칠순노인을 살인범으로 변모시켰을까.진정한 가해자는 누구인가. 흔히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고 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처럼 상습적으로 구타를 일삼고 허벅지에 칼침을 찌르는 등의 잔인한 폭력을 자행하는 것까지 부부간 가정문제로 방치해야 하는 것일까.매맞는 아내가 전체 기혼여성 15%에 달한다는 조사결과는 우리사회의 가정폭력이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도망치거나 이혼하면 되지 않을까생각하지만 남편은 은신처를 집요하게 찾아내 또다시 구타를 일삼았다.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가정문제에 왜 개입하느냐며 외면하거나 남편을 연행해도 곧바로 풀 어주곤 했다.
남편을 없애는 것 외에는 폭력을 잠재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서울대 이용식(李用植)교수 등 다수의 국내 형법학자들은 이같은 정황에 대해 李할머니를 벌할 수 없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연약한 부녀가 남편의 거듭되는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살인을 택할 수밖에 없을 때 정당방위를 인정하든가 ,계속되는 위난(危難)앞에 생명.신체에 대한 위험을 피하기 위한 행동은 다소 과잉수단을 선택하더라도 책임지울 수 없다는 소위 면책적 긴급피난(免責的 緊急避難)이론이 적용된다는 것이다.이런 법논리와 함께 李할머니가 72세의 고령이란 점까지 참작한다면 불구속상태에서 재판받도록 하는 것이 일반정서에 합치된다는 생각이다.
여성.시민단체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가정폭력의 심각성에 주목하고 선진국과 같은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주장하고 있다.가정폭력은 일반적인 형사상 폭행이나 상해와 같은 범죄행위며,경찰의 조기개입과 가해자처벌만이 가정폭력을 근절할 수 있 다는 것이다.그리고 폭력배우자에게 퇴거명령을 내리고,피해자에 대한 보호조치와 재발방지조치를 취하는 것은 국가의 최소한의 의무라는 것이다.최근 유엔 인권위원회는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권고한 보고서를 채택했다.아무런 보호장치도 없는 ■ 태에서 「가해자가 된 피해자」만 처벌하는 현행 법제도는 더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이사건은 생생히 일깨워주고 있다.
문경란 수도권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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