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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의 영화 VS 영화] 범죄의 재구성 VS 지구를 지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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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그 덕분에 주말이 즐거웠던 적이 있었다. 10년전쯤 했던 '서울의 달'과 몇 년 뒤 '파랑새는 있다'라는 두 주말드라마를 보는 우리 부부의 자세는 바로 컬트 팬의 그것이었다. 방어를 완전 풀어헤치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의 준비를 한 채 그저 불씨만 댕겨주기만을 기다리는 컬트 팬의 심정. 그 중에서도 백윤식의 한마디 한마디는 거의 폭탄 수준이었다.

'서울의 달'에서 전직 중학교 미술 선생님인 그는 입만 열면 "뭉크라는 화가는…"을 들먹이며 딸 하나 데리고 혼자 사는 윤미라를 지적으로 감동시켜 마침내 그의 카페 이름마저 뭉크로 바꾸게 했다. 아니 멀끔하게 잘생기고 우수에 찬 눈빛 연기만 하던 저 아저씨 배우가 저런 코미디 연기를, 아니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읊어대는 말이 코믹 연기라고 할 수나 있는 건가. 어쨌든 그의 "뭉크" 한마디에 윤미라 못지않게 자지러지던 우리 부부는 드라마가 끝날 때 너무 아쉬워 했다.

반갑게도 그는 '파랑새는 있다'에서 공중부양에 성공한 뒤 하산한 백관장으로 부활했다. 사기성이 좀더 농후해진 그는 푸슈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말라…"를 읊어대며 밤무대의 차력사 팀을 속여먹고 옌볜 처녀를 속인 뒤 다시 카페 주인을 노리고 있었다. 물론 그는 "사기치는 것도 엄청 공부해야 합니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경륜 있는 사기꾼이지만, 그가 진짜 매력 있었던 건 빤질 빤질한 사기꾼 역할을 하면서도 어딘가 순진한 구석이 있어 보이는, 빈틈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빈틈이 웃음을 만들어 낸다. 그가 병달에게 "내가 이 돈 떼먹을까봐 그러냐?"라고 엄숙한 표정으로 사기를 치려할 때 병달이 다짜고짜 "네"라고 대답할 때의 그 맥빠진 웃음이라니. 이런 '밉지 않은 속물'연기는 그의 연기인생에 한 터닝포인트가 되는 것으로 보였지만 잇따라 중년 연기자들의 코믹 연기로의 전환이 시도되면서 그는 그런 연기자 중의 한명으로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랬던 그가 21세기 들어 영화에 뛰어들면서 내놓은 첫 주연작 '지구를 지켜라'는 겨울잠을 자던 그의 지지세력의 머리를 쭈뼛 세우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성도착자의 속옷 같은 빤짝이 빨간 팬티 하나만을 입고 머리는 빡빡 깎이고 목에는 개목걸이를 건 채 연기해내는 안드로메다의 왕자님이라니. 이태리타월과 물파스 고문, 300볼트의 전기고문, 다리미고문에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문을 뚫고 여전히 엄숙한 표정으로 그가 읊어대는 "로열 분체교감 유전자 코드"며 "유전자 배열 구조"며 심지어 "#@&%?"로 밖에 표시할 수 없는 안드로메다의 언어까지. 이건 핵폭탄급 유머였다. 영화가 종횡무진의 상상력으로 종잡을 수 없는 가지를 뻗어나가는 데는 그의 이런 종잡을 수 없는 연기가 한몫 했다. 그가 "마취됐어, 아프지 않아"라고 자기 최면을 걸며 십자가에 못박힌 손을 빼낼 때, 목에 프릴이 달린 인형옷 같은 걸 입고 탈출을 시도하다 뒤로 나자빠져 마네킹 더미 속에서 자포자기의 웃는 듯 우는 듯한 비명을 지를 때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에게 두 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항복, 항복. 당신의 영원한 팬이 되고 말겠습니다.

그에게 있어 영화 '지구를 지켜라'는 앞의 주말드라마 때와는 차원이 다른, 도저히 다른 배우로 대체할 수 없는 백윤식만의 연기 영역을 만들어 내는 계기였다.

잠자고 있던 그에 대한 컬트팬으로서의 의무감에 눈뜬 나는 그가 혹 다음 작품을 잘못 고르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이것도 '소포모어 징크스'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오십 넘은 나이에 활짝 개화한 그의 새 연기가 '화무십일홍'으로 끝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러나 '범죄의 재구성'에서 그는 그동안 쌓아왔던 '우아한 사기꾼'의 내공을 한데 모아 폭발시키면서 젊은 배우들을 자신의 에너지로 압도하고 있었다. 정장 수트를 쫙 빼입고 와인을 즐기는 그가 저음으로 나른한 듯 이야기 하다 마지막에 목소리에 김을 살짝 빼며 "청진기 대보면 딱 나와. 시추에이션이 좋아"라고 중얼거릴 때, 혹은 한참 절도 있고 매너 있게 이야기 하다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어떤 ××놈이 그런 소릴 해?"라고 소리 지를 때, 그는 이제 자신의 연기에 확고한 자부심과 자의식을 가진 중년 연기자로서 매력을 분수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준엄함.경박함이 공존하는, 표정과 말의 상반됨이 만들어내는 엉뚱함의 묘미.

하지만 영화에서 그가 최후의 승자가 됐다면 그의 매력은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박신양과의 머리싸움에서 패배한 뒤 허탈한, 그러나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나 완전히 수술당했다, 뇌수술, 그것도 중상이야"라고 뇌까릴 때 '빈틈 있는 사기꾼'이라는 자신만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그는 여전히 관객의 동정을 사는 매력적인 악역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엉뚱해 보이는 듯한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어떤 음험한 계획이 숨어있는 걸까? 한국의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 잭 니콜슨? 숀 코너리? 하지만 이 배우 중 누가 그처럼 멀쩡한 중년 신사에서 팬티 입고 머리카락으로 교신하는 외계인까지 한데 아우를 수 있을까. 우린 그저 대체 불가능한 이 중년배우의 뒤늦은 개화를 기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엔 없다. 그런데 왜 인터넷엔 제대로된 백윤식 팬 카페 하나 없는 거야. 안되겠다. '행동하는 팬'으로서 모범을 보이기 위해 나라도 만들어야지.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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