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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강1만리>제2부 강서.안휘성-남창의 등왕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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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등왕의 높은 누각 강가에 서있는데 구슬소리 방울소리 노래와 춤 지금은 멎었도다 아침엔 단청기둥에 남포의 구름 감돌고 저녁엔 주렴에 서산의 비 휘날리네 한가로운 구름 유유히 날마다 연못에 그림자 드리우는데 세월은 흘러흘러 몇해가 지났는가 누각에놀던 등왕 지금은 어디메뇨 난간 밖 장강은 부질없이 절로 흘러만가누나 -왕발의 『등왕각서』중에서 강서성의 성도(省都) 남창(南昌)은 중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혁명의 도시다.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8.1광장」「8.1공원」「8.1대교」가 상징하듯 중국공산당의 살아있는 역사가 숨쉬고 있다.
1927년 8월1일 새벽,주은래.주덕.하룡.섭정.유백승 등을중심으로 한 중국공산당 무장세력이 이곳에서 국민당군 1만여명을일거에 무찌르고 독자적으로 혁명전쟁을 선포했다.남창의 「8.1」은 바로 이날의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지난 77년 남창기의(南昌起義) 50주년을 기념해 「8.1남창기의 기념탑」을 인민광장에 세우기도 했다.
탐사단은 7월 복중 남창에 들어갔다.장사(長沙)에서 밤기차를타고 더위와 사투를 벌이며 남창역에 도착했다.내리깔리는 눈꺼풀을 주체하지 못하고 역을 나서자 아연 피로는 저만큼 사라졌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온몸이 깨어났다.역광장은 때아닌 인파로가득차 있었다.거의 반나체에 가까운 군중이 누운 채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남녀노소 구별이 없었다.새벽이라 거리는 철시상태,마치 서울의 어느 봄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역광장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도로까지도 점유한 상태였다.
남창은 장강 유역 4대 화로(火爐)의 하나다.그들은 더위와의전쟁을 이런 식으로 해결하고 있었다.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인간은 너무나 무력했다.남창도 개방의 바람이 불어 시내 곳곳에 빌딩과 도로정비가 이뤄지고 있다.머지않아 에어컨 이 들어오는 날 이런 진풍경도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혁명,더위의 도시 남창은 또다른 보고(寶庫)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등왕각(등王閣)이다.악양의 악양루,무한의 황학루와 더불어 등왕각은 강남 3대 명루의 하나로 꼽힌다.악양루와 황학루가군사적 목적에서 처음 건립된 것과 달리 등왕각은 전적으로 시부(詩賦)를 음영하거나 연극을 공연하며 주연을 베풀기 위해 지은예술적 정취가 농후한 누각이다.
등왕각은 당(唐)고조 이연의 둘째아들이자 태종 이세민의 아우인 등왕(등王) 이원영이 홍주(洪州:지금의 남창)도독으로 있던653년 처음 건립됐다고 전한다.등왕은 워낙 서화.음률.가무에능통하고 유렵을 즐겼다.등왕각은 그를 위한 연 악가무의 장소로건립된 것이어서 건축양식 자체가 악양루나 황학루와는 달랐다.
남창은 예부터 「오두초미(吳頭楚尾)」로 일컬어지는 강서의 전략요충지다.그런 탓에 등왕각은 전란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소실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지난 1천3백여년 동안 28차례나 파괴됐다.마지막으로 불탄 것이 1926년 10월 국민혁명군이 북벌중 남창으로 진공했을 때다.북양군벌 등여탁이 방화를 명령,소실됐다.
지금의 등왕각은 지난 89년 중양절에 29번째로 중건한 것이다.높이가 57.5고 건축면적은 9천4백평방에 달한다.중앙의 본채 건물은 보는 위치에 따라 3~5층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7층으로 되어 있다.송나라 때의 목조건물 양식에다 당대 누각의 특징을 가미했다.
등왕각이 이처럼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까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왕발(王勃)의 『등왕각서(등王閣序)』라는 시가있었기 때문이다.이는 마치 악양루가 두보와 범중엄의 시부(연재32회 참조)로,황학루가 최호의 시(연재 34 회 참조)로 유명세를 얻은 것과 같다.
왕발이『등왕각서』를 짓게된 계기는 다음과 같은 일화로 전해진다.당 고종 2년(675)가을,당시 홍주도독 염백서는 등왕각을중수하고 낙성에 즈음해 문사들을 초빙,잔치를 벌이며 새 누각의형세를 글로 남기도록 했다.그러나 염백서는 내 심 그 일을 그의 사위에게 맡길 심산이었다.이런 영문을 모르고 마침 아버지를찾아가는 길에 홍주를 지나던 왕발은 잔치에 들러 글 짓는 일에참여하게 됐다.
이에 심기가 상한 염도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몰래 사람을 시켜 왕발이 글을 어떻게 엮어나가고 있는지 사이사이 자기에게 알리도록 했다.
첫번째 보고가 들어왔다.『「남창의 옛 고을 홍도의 새 고장(南昌古郡 洪都新府)」이라고 써나가고 있습니다.』『영감들이 흔히쓰는 투지.』 이어 두번째 보고가 들어왔다.『「별자리는 나래를펴고 땅은 여산쪽으로 잇닿았도다(星分翼軫 地接衡廬)」 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염도독은 아무 말이 없었다.다음 소식이 또 들어왔다.
『「저녁노을 외로운 해오라기와 함께 날고 가을 물 아득히 하늘과 한 빛이라(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고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이에 마침내 염도독은 깜짝 놀라 『그야말로 천재로다.그 이름 길이 전해지리로다』라며 왕발을 정중히 모셨 다고 한다.이렇게 탄생한 것이 『등왕각서』다.이 글의 끝부분에 앞서인용한 전문의 시가 한편 붙어있다.(원문은 다음과 같다.등王高閣臨江渚 佩玉鳴란罷歌舞 畵棟朝飛南浦雲 珠簾暮卷西山雨 閑雲潭影日悠悠 物換星移度幾秋 閣中帝子今何在 檻外長江 空自流) 이처럼 왕발의 시로 유명세를 얻은 등왕각은 이어 1519년 당백호(唐伯虎)가 굽이쳐 흐르는 감강에다 예향 남창을 그린 「낙하고무도(落霞孤鶩圖)」로 또한번 위용을 뽐냈다.또 1598년 탕현조(湯顯祖)는 자신의 극본 『모란정』이 등왕 각에서 초연되는 것을 관람했다.이어 1627년 풍몽룡(馮夢龍)이 민간전설에 근거해 화본소설 『마당신풍송등왕각(馬當神風送등王閣)』을 지었다.그런가하면 1702년 청(淸)의 강희제는 등왕각 중건 소식을 듣고 동기창(董其昌)이 쓴『등왕 각서』를 임첩해 내려보내자 그 글을모시는 어서정(御書亭)이 경내에 지어졌다.
1788년에는 당대의 명필 옹방강(翁方綱)이 그의 살아움직이는 듯한 필치로 『등왕각서』를 남겼다.이는 한결같이 등왕각과 왕발의 『등왕각서』를 두고 1천여년 이어온 예맥의 향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강서성을 관통하면서 파양호에 이르는 감강 가에 우뚝 선 등왕각은 남창의 명물일 뿐만 아니라 강남풍류를 대표하는 누각이다.
거금 1천3백여년전 당 고조의 둘째아들 등왕 이원영이 처음 건립한 이래 28차례나 파괴됐지만 지난 89년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긴 생명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왕발의 『등왕각서』라는명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글=이병한(서울대 중문과 교수) 사진=이해범(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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