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에서 대형 사업가로 변신한 가수구창모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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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1991년 은퇴 후 구창모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해외에서 사업가로 성공했다는 뉴스가 간간이 나온 게 전부. 그는 은퇴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고 가수가 아닌 사업가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최근 뮤지컬 음악 감독으로 깜짝 컴백한 구창모, 그를 만나 지난 17년 동안의 궁금했던 얘기들을 들었다.

은퇴 후 17년 동안 내게 생긴 일,
성공과 좌절 그 드라마틱 인생 노래

잠시 과거로 돌아가보자. 서른 즈음부터는 구창모라는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할 것이다. 송 골매 보컬이었던 구창모는 80년대 최고의 인 기를 누리던 톱가수. 라디오 DJ로 활동중인 배철수 역시 송골매의 멤버였다. 당시 송골매 는 그룹 사운드로는 유일하게 가요 순위 프로 그램 1위를 독식하다시피 했고, 이후 솔로로 전향한 구창모 역시‘희나리’‘아픈만큼성숙 해지고’등을 발표하면서 인기를 이어나갔다. 한창 잘나가던 시절, 구창모는 91년 돌연 은퇴 를 결심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은퇴 후 사업가 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오긴 했지만,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인터뷰 를 위해 어느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마주한 구창모는 당대 톱가수가 아닌 성공한 사업가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의 현재 직함은‘아티스글로 벌’회장. 바쁜 일정을 쪼개 잠시 외국에서 귀국한 그는 이틀 후면 다시 중앙아시아 북 부의 키르기스스탄으로 떠난다고 했다. 이 나라 최대 규모의 아파트 건설 프로젝트를 진두 지휘하는 그의 스케줄 표에는 빈 공간 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구창모와의 인터뷰는 잘나가던 가수 생활을 접고 왜 갑자기 은퇴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관한 얘기부터 시작되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자동차 딜러로 사업 시작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의 건설 프로젝트 진행 “90년대 초 가요계에 굉장한 평지풍파가 일어 났었는데 소위 PD 사건이 그것이었지요. 그 때 겪은 상처가 은퇴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가요계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어요. 제가 가수를 그만둔 것에 대해 그동안 많은 얘기들이 돌았죠. 그러나 당사자 인 저에겐 이 일이, 지금도 아물지 않은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구창모가 언급한 PD 사건이란, 가수들과 매 니저들에게 돈을 받은 쇼 프로그램 담당 PD 가 검찰에 구속된 사건을 말한다. 프로그램에 가수를 출연시켜준다든지, 방송에서 노래를 틀어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은 것. 구창모는 검 찰에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당시 그 일을 겪으면서 내가 가수를 왜 했나 싶은 생각도 들고, 정말 일에 대한 회의가 들 었어요. 그러다 91년도에 카자흐스탄에서 아 시아 가요제가 열렸는데, 거기에 초청을 받았 죠. 그곳 무대에 선 것을 계기로 카자흐스탄이 라는 나라와 인연을 맺게 된 거예요. PD 사건 으로 가수를 그만두어야겠다고 결심했을 무 렵, 그곳에서 지인의 소개로 현대자동차의 수 입과 판매 일을 하게 되었어요. 정말 우연찮게 시작한 일이었는데, 생각 외로 사업이 술술 풀 렸지요.”

얘기는 자연스럽게 사업 쪽으로 흘러갔다. 당 시 구창모는 현대자동차를 수입해 팔았는데 가수로 활동할 때보다 수입이 더 짭짤했다. 카 자흐스탄에는 한국 자동차 수입 딜러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구창모는 경쟁 상대 없이 차를 팔 수 있었다.

“한번은 자동차 바이어에게 제가 한국에서 알 아주는 가수였다고 했더니, 처음엔 안 믿더라 고요. 그래서 즉석에서 비틀스의‘예스터데 이’와 프랭크 시나트라의‘마이 웨이’를 불러 줬어요. 노래가 끝나자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차 34대를 계약했습니다. 그렇게 차를 파는 건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보드카만은 정말 쥐 약이었어요. 제가 술을 전혀 못하는데 한동안 술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습니다.” 갑작스레 사업가로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 구 창모. 하지만 이런 스토리에 꼭 빠지지 않는 성공의 부작용이 하나 있는데, 바로 주인공의 교만이다. 구창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한동안 스스로 도취되어 제 잘난 맛에 살았다 고 털어놓았다.

“당시 저는‘뭐든지 잘하는 놈이다’‘복 받은 사람이다’라고내심자위하면서굉장히교만하 게 지냈어요. 송골매로 데뷔했을 때는 그룹도 잘되고, 솔로로 전향하자 그것도 잘 되고, 한 번도 해보지도 않은 사업을 시작했는데도 성공 했으니, 한마디로 겁나는 게 없었죠. 돈을 워낙 당시저는‘뭐든지잘하는놈이다’

‘복받은사람이다’라고내심자위하면서 굉장히교만하게지냈어요. 한번도해보지도 않은사업을시작했는데도성공했으니, 한마디로겁나는게없었죠. 돈을워낙 잘버니까눈에보이는게없었던거예요.

잘버니까눈에보이는게없었던거예요.” 91년부터 시작된 구창모의 성공 드라마는 97 년이 되자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을 맞았다. 그는 홍콩에서 녹용 사업에 손을 대었고, 그 사업 실패로 인해 그때까지 벌어 놓은 돈을 다 날리고 말았던 것.

“지인의 말만 믿고 홍콩에서 녹용 사업을 시작했어요. 당시 6개월 만에 30억원을 날렸어 요. 3년 동안 벌어 놓은 돈을 한순간에 잃게 된 거죠.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1년 동안은 아무 것도 못하겠더라고요. 눈앞이 캄캄해지는게… 생각해 보세요. 6개월 만에 그 많은 돈을 몽땅 날렸으니.”

사업 실패로 한때 좌절, 열살 연하 박미순씨 만난 후 재기에 성공 다행스럽게도 홍콩에서의 사업 실패는, 사업 가로서 그의 커리어를 한 단계 올리는 데 좋은 경험이 되었다. 그는 조직 관리, 마케팅, 자금 운용, 리스크 관리 등 비즈니스를 하려면 시스 템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배웠다.

“사업이 이런 것이구나, 가슴에 확 와 닿았어 요. 그리고 체계를 잡아 나갔죠. 97년엔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넘어가 자동차 딜러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어 99년에는 중국으로 건너 가 한류 열풍의 주역인 한국 드라마 TV 프로 그램 판권 사업을 벌였죠. 시간이 조금씩 흐르 자 기반이 잡혀 갔어요. 그리고 카자흐스탄 바 로 옆 나라인 키르기스스탄으로 가서 본격적 으로 건설업도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사업 실패로 인해 한 가지 더 얻은 것 이 있다면, 아내 박미순씨와의 만남이다. 그는 홍콩에 있을 때 아내 박미순씨를 처음 알게 되 었다. 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박미순씨는 홍콩 에서 알아주는 의류 사업가로 자신의 사업체 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구창모는 정신적으 로나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였는데, 그녀를 본 순간 그동안의 힘든 기억을 모두 잊고 말았다.

“여러 명이 함께 있었는데 정말 집사람 모습 만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처음엔 어떤 일을 하는지, 결혼 했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전혀 몰랐어요. 하지만 너무 마음에 들어 모임이 끝난 뒤 다시 만나기 위해 집사람을 수소문했 어요.”

박미순씨는 이미 홍콩을 떠나 한국으로 간 상 태. 구창모는 그녀의 한국의 집 전화번호를 알 아내기 위해 한 달을 보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가자마자 전화부터 걸었다.

“처음엔 저와 만나는 걸 꺼려 하더라고요. 제 가 연예인인 데다 나이도 열 살이나 많았으니. 하지만 사업 때문에 조언을 구하고 싶다는 핑 계를 대서 어렵게 데이트를 시작했죠. 만나면 만날수록 이 여자와 결혼하면 좋겠다는 생각 이 들더라고요. 그런 느낌은 집사람이 처음이 었죠. 집사람을 꾸준히 설득해 만난 지 1년만 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혼한 지 3년 만에 아들 정연이를 낳았 고 결혼 후 사업도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섰다. 그는 사업가 출신의 아내 덕분에 집에서도 자 주 조언을 얻는다고 했다.

“저희 가족은 결혼 직후부터 지금까지 떨어져 지내고 있어요. 아내는 아이와 한국에서 지내 고, 저는 사업 때문에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 어요. 반대로 된 기러기 가족인 셈이죠. 아내 는 세상에서 가장 저를 믿고 이해해 주는 사람 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일을 해봤던 사람이 라서 통이 커요. 사업 실패 후 상심에 빠져 있 던 저에게 집사람이 정말 많은 격려를 해주었 어요. 지금도 사업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아 내에게 조언을 구하곤 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아들 정연이는 구창모를 쏙 빼닮은 모습이다.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쑥쑥 자라 있는 아들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아내는세상에서 가장저를믿고이해해 주는사람입니다. 무엇보다자신이일을 해봤던사람이라서 통이커요. 사업실패후 상심에빠져있던 저에게집사람이정말 많은격려를해주었어요.

“제가 아들에게 늘 하는 얘기가 있어요. 학교 공부도 물론 중요하지만, 책상 앞에만 앉아 있 지 말고 친구들과 밖에서 뛰어놀라고 얘기해 요. 그리고 아내에게도 아이를 자유롭게 키우 자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한국에 올 때마다 부 모들의 교육열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요. 정연이는 이제 겨우 초등학생일 뿐인데 왜 그렇게 배우는 게 많은지. 스케줄이 너무 빡빡 하더라고요. 아내에게 물어보니까 다른 아이 들도 다 그렇게 배운다고 하대요.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따로 있는데…. 부모들이 왜 아이들 을 해외로 보내는지 가끔은 이해가 됩니다.” 아이들에겐 학교 공부도 중요하지만 인성 교 육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그의 모습에서 영락없는 아버지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초등학생 아들 둔 아빠로 기러기 가족 생활 배철수와 함께 송골매 앨범 발표할 예정 어느덧 사업가로 안착한 구창모이지만 음악 에 대한 미련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사업 을 하면서도 예전에 자신이 가수라는 것을 한 시도 잊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취재_모은희 기자 사진_조병각(studio lamp) 장소협조_산레모(031-908-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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