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거대 게임’… 러, 미국의 허를 찌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그루지야와 러시아의 전쟁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의 군사작전 종결 선언으로 일단은 ‘5일 전쟁’으로 막을 내렸다. 표면적으로 이번 전쟁은 러시아계 주민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그루지야 내 자치공화국 남오세티야를 그루지야가 침공하자 러시아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그루지야군을 제압하면서 마무리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면에는 ‘신 거대 게임(New Great Game)’이라고 하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거대 게임’은 19세기말 제정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인도양으로 나가는 길을 놓고 대영제국과 충돌했던 패권 경쟁이다.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의 분쟁 지역들은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키우려는 미국과 유럽연합(EU), 그리고 다시 옛 소련 시절의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러시아 간에 새로운 거대 게임의 장이 된 지 오래다. 이 지역에서 터진 여러 차례의 분쟁과 갈등의 배경에는 거의 미국과 러시아가 있었다. 이번 그루지야 전쟁 역시 미국과 러시아가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신 거대 게임의 양상을 보여줬다.

이번 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게 됐다. 국지적으로는 친러시아 성향의 남오세티야를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지원함으로써, 반러시아 벨트의 일원이었던 그루지야 영토 내에 확실한 친러시아 근거지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그루지야는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몰도바와 함께 반러시아 성향 국가들의 모임인 GUAM(4개국 머리글자를 딴 이름)의 일원이다. 러시아는 또한 국제적으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진을 더 이상 방관하고 있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 고유가와 지도자의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에 힘입어 수퍼파워의 위상을 되찾아 가고 있는 러시아는 이번 전쟁을 통해 신 거대 게임의 핵심 플레이어로 보란 듯이 부활했다.

반면 그루지야를 지원하는 미국과 EU는 그루지야의 패전으로 인해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그동안 그루지야 군인을 훈련시키고 군사장비를 원조하는 등 그루지야와의 군사동맹을 강화시켜 왔다. 또 BTC(아제르바이잔 바쿠-그루지야 트빌리시-터키 제이한) 송유관 건설을 비롯한 에너지 및 교통 인프라 건설을 통해 GUAM 및 남카프카스 국가들과의 정치외교적 연대를 강화해 오고 있다. 나아가 그루지야에 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려 하고 있으며, 동유럽에 건설하려는 미사일 방어(MD)체제를 그루지야로까지 확대하려고 노력해 왔다. EU는 미국처럼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나, 인프라 구축을 비롯한 경제·사회적 지원을 통해 이 지역에서의 분쟁이 자신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려 했다.

남오세티야를 포함해 옛 소련 해체 이후 생겨난 다수의 분쟁 지역들은 밀수와 블랙마켓, 테러 및 인종청소 등으로 주변국의 정치· 경제적 안정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는 ‘블랙 홀’이었다. 그러나 이제 미국과 EU는 남오세티야라는 ‘블랙 홀’에 러시아군이 평화유지군이 아닌 사실상의 주둔군으로 상주하는 상황을 묵인해야 할 처지가 됐다. 나아가 그루지야와 함께 남오세티야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BTC 송유관과 같은 에너지 운송 루트의 안정성이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 경제 원조와 투자를 통해 카프카스 지역의 친미 벨트를 확고히 하고자 했던 미국의 정책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이 확실하다.

앞으로 미국과 EU는 전쟁 이전의 상태로 남오세티야 상황을 돌려놓기 위해 외교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는 기존의 BTC 라인을 포함한 안정적인 에너지 수송로를 확보하고, 유럽의 대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고, 기존의 반러시아 벨트 유지를 위해서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에너지 자원을 무기로 EU와 나토를 견제하면서 옛 소련 지역을 자신의 영향권 안으로 다시 끌어들이려는 러시아의 입장과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러시아는 또 이번 전쟁을 계기로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나 미국의 동유럽 MD 구축 계획 등에 더 강력한 제동을 걸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러시아와 서방 관계가 더욱 악화할 수 있는 이유다. 그루지야 전쟁은 국제 분쟁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 거대 게임이 냉전시대 열강들 간의 첨예한 대립구도를 재현시킬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유승만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전임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