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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금 450만원에도 1000여 명 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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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유럽에서도 프로 기사가 장래 희망인 어린이가 많지만 일상에서 바둑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사진은 유러피언 콩그레스에 참가한 어린이들. [바둑신문 제공]

스톡홀름 인근의 공항에 도착한 것은 7월 25일 밤 10시가 가까웠다. 여름이면 낮이 한없이 긴 북구의 나라 스웨덴엔 이제 막 해가 지고 있었다. 대회장인 렉산드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가는 3시간 동안 아파트 한 채 보이지 않았다. 유럽에 온 것이다.

2008 유러피언 콩그레스(유럽선수권)는 거대한 호수 주변의 휴양지 렉산드에서 열렸다. 유럽 각국 바둑광들이 모여 15일 동안 그야말로 바둑만 두다 간다. 오락 프로그램은 일절 없고 참가비도 무려 18만원이나 된다. 그래도 올해 참가인원은 1000명을 넘어섰다.

바둑 프로그램은 다양하다. 메인 대회 외에도 마스터스 챔피언십, 페어대회, 주말 속기대회, 팀 대항전 등이 있고, 프로기사들의 다면기, 강좌, 세미나 등이 열린다. 벌써 52년째니까 동양권의 국제 아마대회보다 몇 배나 긴 역사다.

메인 대회는 철저히 오픈 대회다. 동양권 아마 강자는 물론 프로기사들도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다만 우승상금이 3000 유로(약 450만원)밖에 안 되니까 수지를 따져봐야겠지만.

그러나 올해도 한국에선 홍석의 7단 등 최정상의 아마기사 4명과 여성바둑연맹 회원들, 명지대 바둑학과 학생 등 40여 명이 대회에 참가했다. 유럽 바둑과 인연이 깊은 일본은 무려 100여 명이 찾아왔다.

한국기원은 오규철 9단, 노영하 9단, 김민희 3단 등 3명의 프로기사를 파견했고, 대한바둑협회에선 조건호 회장이 개막식에서 간단한 스피치도 했다.

동양이 서양에서 대접받는 것은 아마도 바둑이 유일할지 모른다. 한 수 가르쳐준다는 것, 그것은 일단 강력한 힘이다. 유럽 바둑인들은 동양 문화에도 익숙해 김치는 물론 고추장도 잘 먹는다. 일본이나 한국의 수많은 인사가 그 많은 경비에다 20여 시간의 힘든 여정에도 불구하고 바둑 관련 선물까지 듬뿍 싸들고 이곳을 찾아온 이유도 이런 분위기 영향이 클 것이다.

유럽 대회에 동양인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더없이 매끄러운 대회 진행과 더 진지할 수 없는 대국 분위기였다. 한국의 아마추어 대회들은-중국이나 일본도 비슷하겠지만- 언제부턴가 대국의 진지함을 잃고 말았다. 단 이틀 만에 끝나는 대회는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고 하루에 5, 6판을 소화하는 강행군 속에서 바둑 특유의 여유와 향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게 그리워 거꾸로 유럽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러피안 콩그레스의 메인 대회는 제한시간이 무려 3시간이었다. 하루에 딱 한 판만 둔다. 월~금요일까지 다섯 판을 두고 이틀을 쉰 다음 다시 다섯 판을 둔다. 스위스리그가 가미된 변형 맥마흔 시스템이라는 특이한 방식으로 각자 10국을 소화하면 우승자가 가려지고 랭킹도 정해진다. 대국 때는 한참 하수들조차 자신의 바둑을 직접 기록도 한다.

대회장은 학교였는데 이곳만으로는 모자라 근처 교회와 공공건물 10여 곳에서 나뉘어 열렸다. 도착 다음날인 26일은 등록일. 아마 유단자도 생각보다 많지만 10~20급도 많다.

국가 챔피언급의 강자들은 대개 혼자 왔지만 부부나 어린이, 젊은 여성들이 형형색색의 옷차림으로 몰려든다. 본부에 두 줄로 늘어서서 참가비를 낸 다음 숙소 열쇠와 자기 이름표를 받아간다.

렉산드는 여름이면 수많은 피서객으로 붐빈다. 그래서 주최 측인 유럽바둑연맹은 이미 6개월 전에 이 부근의 호텔이나 방갈로 등을 확보해 두었다고 한다. 나도 좀 더 확실한 취재를 위해 거액(?)의 참가비를 내고 대회에 참가했다.

27일 아침, 본부 앞에 두 장의 방이 붙었다. 메인 대회 참가자는 667명. 이 중 유단자는 200여 명이고, 10~20급도 100명쯤 된다. 우승을 다툴 수퍼 그룹은 32명. 한 장의 방엔 이들을 랭킹 순으로 적었고 다른 한 장엔 상대 대국자와 대국장, 테이블 번호가 적혀 있다. 그걸 확인한 사람들이 저마다 조용히 자신의 대국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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