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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역사] 48. 빛의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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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필자가 5.16쿠데타 이후 열린 각계 인사 상면회에서 처음 만난 박정희 장군.

KBS 일본어 방송에서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내보내자고 했다. 나는 극본을 쓰고 아나운서들과 같이 출연도 했다. 한국일보 부사장이 된 홍유선이 술 한잔 사주겠다고 했다. 김종규와 함께 나왔다. "왕초가 말이야. 아로운 이야기 속편은 한국일보에 연재하자고 그러는데. 고향이니까…."

"'현해탄은 말이 없다'로 갈까?"

"그거 좋다."

"아로운전 제2부야."

그래서 1962년 봄. 마침내 나도 신문 연재소설을 쓰게 됐다. 감개무량했다.

정음사의 직판 서점인 충무로 입구에 있는 문예서림에선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현해탄은 알고 있다'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고 했다.

이때 국가 운명을 바꿔놓는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5.16 쿠데타이다. 학생들은 당장이라도 38선에서 북과 만나자는 기세였는데 난데없이 군이 나라를 점령해버렸다.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삼엄한 계엄령하에서 방송국은 초긴장 상태였다. 군이 모두 점거했는데 KBS 책임자로 온 김창파 대령이 나를 찾는다고 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우리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의 전기를 써주십시오."

나는 어리둥절했다.

"급합니다. 즉시 좀 착수해 주십시오."

"제 버릇이 있습니다. 전부를 알지 못하면 붓이 나가주질 않습니다. 한동안 관찰할 기회를 주셔야겠습니다."

"얼마나요?"

"한 3개월…."

"대단히 바쁜 양반인데… 하여튼 서둘러 주세요."

매일 세상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데 나하고 접촉할 시간이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가 장도영은 반란죄를 뒤집어쓰고, 박정희 장군이 전면에 나왔다. 선글라스를 쓴 그의 뒤에는 새파란 청년 장교 김종필이 있었다. 오재경 공보실장의 주선으로 코리아 하우스에서 각계 인사들과의 상면회가 열렸다. 박정희 장군은 내 손을 잡자 "잘 듣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어느 날 공군 정훈감으로 있는 주정호 대령이 참모총장과 밥 한끼 먹자고 했다. 충무로의 '새마을'은 당시 일류 식당이었다. 장성환 총장.장지량 차장과 주 대령 등 공군 고위 간부가 모두 나온 것 같았다. 장총장은 어릴 때 하늘에 꿈을 품고 일본 소년비행단에 들어간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나라 소년들에게도 꿈을 줄 수 있는 작품을 하나 써 달라고 했다.

"저는 공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데요."

"'현해탄을 알고 있다'를 들으니까 거의 같아요. 즉시 시찰을 한번 해보세요."

성급한 사람들은 나를 태우고 대구 K2 기지로 안내했다. 박재호 대령이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브리핑이 끝난 뒤 T33에 타보라고 했다. 한국전쟁 때의 쌕쌕이다. 처음으로 제트기를 타보았다. 이륙하자마자 부드럽게 고도를 높이더니 "저 아래가 울산입니다. 저기 보이기 시작하는 곳이 해운대고요"라고 조종사가 인터폰으로 설명했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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