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북한>10.'수용소식'경제특구 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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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 좌절.긴장,그리고 기대 ▶ 金日成은 살아있다 ▶ 효자둥이는 충성둥이 ▶ .장군님'의 軍心 달래기 ▶ 식량난의 허실 ▶.수용소'식 경제특구 ▶ 金正日 치하의 민심 ▶ 체제유지 자신감 있나 ▶중국=전택원 부장 ▶일본=방인철 부장 ▶美서부=안희창 기자 ▶독일=유영구 전문기자 ▶美동부=김용호 전문기자 북한은 89년 이후 옛소련등 잇따른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붕괴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았다.
그러나 북한은 지금 빙하기(氷河期)에 처한 매머드의 운명보다조금도 나아 보이지 않는다.사회주의 경제권의 물물교역 방식이 박물관 속으로 사라진 지금 북한은 대외무역에 관한한 자본주의적세계무역 질서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고 이를 위한 내부개혁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사정은 촉박하다.정치.
군사적 혈맹관계였던 중국조차 4월1일부터 경화(硬貨)가 아니면거래할 수 없다고 통고해놓은 상태다.
중국은 이를 올해 초부터 적용하려 했으나 지난해 마지막 분기계약중 이월된 것이 있기 때문에 2.4분기로 미뤘다.중국이 북한과 교역했던 물량 가운데 상당부분이 한국쪽으로 바뀔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90년대 들어 북한에 극심한 외화난이 돌출했다.김일성(金日成)주석이 「언제 우리가 돈 갖고 무역했나」라고 말했듯이 북한에서 외화는 무역거래의 주요수단이 아니었다.따라서 당초 북한은「외화사정이 나빠진게 아니라 그런 문제가 아예 없었다」고 해야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경화가 없으면 필요한 물자를 구할 수 없게 됐다.북한은 급격한 사태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재일동포) 『북한은 물물교환 방식에 의한 무역자료 밖에 없어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거래를 위한 새로운 무역체계를 수립하고 계획을 입안하는데 곤란을 겪고 있다.
부문별로 수출입을 총괄할 근거가 없는데다 무역관행에도 어두워95년 말까지도 경제계획 작성에 차질을 빚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앞으로 1년 안팎으로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북한당국은대미(對美)관계가 풀리면 새롭고도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것으로보고 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 재독동포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동안 무역구조 개편작업을 벌여온 북한이 외화난이 가중될경우 묘향산 금광개발에 나설지도 모른다고 밝혔다.수년전 묘향산지구에서 초대형 금광맥이 발견됐으나 김일성이 후대(後代)와 묘향산 풍치보존을 위해 개발금지령을 내리는 바람에 외화난에도 불구하고 아직 개발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북한은 더이상자력갱생 방식에 집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금광개발과 같은 「언 발에 오줌누기 식」미봉책으로 해결될 사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 늦기전에 사회주의식 경제체제를 개편,외부환경 변화에대응해야 된다는 걸 북한지도층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金正日)비서는 평소 개혁.개방에 큰 관심을 기울여 왔다.그는 조국의 근대화와 개혁.개방에 획기적 역할을 할 것이다.』김정일과 여러번 만났던 한 재중동포는 김정일의 개방의지를굳게 믿고 있었다.
『김정일동지는 세계의 변화추세와 개방문제를 잘 알고 있다.그는 이미 개방시책을 마련해 일부 실천하고 있다.앞으로 중국수준의 시장경제 도입도 가능할 것이다.』지난해 4월 북한 당기관지노동신문 정치담당 기자가 어떤 재미동포에게 들려준 말이다.
『김정일은 중국이 개방한지 얼마후인 83년6월 개방현장인 선전(深 수)을 비밀방문,주변 농촌마을까지 샅샅이 돌아본 것으로알려져 있다.그는 그 당시 중국의 개혁작업이 농촌개혁에서 시작돼 성과를 거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작용이 만 만치 않다고 판단해 「우리는 농촌에서의 집단주의 원칙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재중동포) 중국방문 다음 해인 84년 북한의 첫 개방관련 법령인 합영법이 나왔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그러나 북한 특유의 방식을 탈피하지 못함으로써 10여년에 걸친 개방실적은 「죽어가는 사람의 콧김」정도로 북한경제 소생에는아무런 성과를 가져 다 주지 못했다.
북한의 활로는 지금까지의 한계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결단이 아니고서는 열리지 않는다.그리고 그러한 최종결단을 할 수 있는 주체는 김정일 뿐이며 그 시기가 임박했다는 예상들이다.
『개방이 반드시 사회주의 체제고수 목적에만 한정돼 있는 것은아니다.「남조선 해방」도 정치적 구호이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재일동포) 『중국은 개방정책을 도입하기까지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단순원칙을 확인하는데 어려움을 겪은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일단 이 원칙에 도달하고 나면 실사구시에기초하는 정책 자체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반감이 없다. 지도층이나 일반층이나 대우가 비슷하고 향수(享受)에 차이가 없으므로 반감을 느끼지 못한다.북한은 개방 당시의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안정돼 있다.특히 지역이 좁아 중앙권력의 집중관리가 유리하다.북한은 빠른 시일안에 개방한다.』(재중동포) 그러나 여러 경로의 정보는 북한지도부가 여전히 개방의 부작용에 관해 강한 의구심을 갖고있어 그 대응에 골몰하고 있음을 확인할수 있다.다만 개방의 불가피성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나진.선봉 경제특구에 이르기까지 개방정책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다.특히 법제.운영등 측면에서 미흡하다고 보고 전면적인 재검토 및 보완작업을 해오고 있다.다만 북한이 자체적으로 투자환경을 개선할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다.』( 재중동포) 『북한이 변화에 대응하는데 반드시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직 공개적인 표명은 않고 있지만 북한지도층 사이에는 중국처럼개혁.개방을 해야한다는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북한 핵심엘리트의 다음과 같은 전언(傳言)은 김정일의 국가주석 취임과 새 정책노선 등장과 관련해 중요한변화를 시사하는 것으로 주목된다.
『김정일은 96년 10월17일의 「타도 제국주의동맹」(ㅌ.ㄷ)창설 70주년을 맞아 국가주석에 취임한다.그런 다음 연말이나내년 초까지 새로운 정책을 내놓을 것이다.』김일성은 항일투쟁기간인 1926년 「ㅌ.ㄷ」을 결성했다고 한다.이른바 반제(反帝)자주를 원칙으로 하는 이 동맹은 북한 대외정책의 뿌리에 해당한다. 바로 이 날을 택함으로써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광과 70년에 걸친 전통노선을 재확인하면서 새로운 「현실노선」을 접목시키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당뇨병에 시달리고 있는 강성산(姜成山)대신 연형묵(延亨默)을 총리에 재기용해 새진용을 갖출 것이란 전망이다.
「김정일의 개방정책」은 우선 대미관계 돌파,한국과의 교류를 전제로 하면서 유일한 유망산업인 관광개방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예상된다.한 재중동포의 증언.
『지난해 가을 방북(訪北)때 고위 당국자들이 여러번 백두산 관광지구 개방을 언급했다.백두산 부근의 삼지연 공항과 러시아의하바로프스크간에는 이미 여객기가 취항중이다.앞으로 평양,선양(瀋陽),옌볜(延邊),창춘(長春),나진.선봉지구와 항공로로 연결되고 한국인도 비자없이 관광하게 될 것이다.백두산에는 국제동물보호구 및 국제식물보호구가 있고 삼지연에는 김일성의 항일투쟁활동과 관련,정화사업이 잘 돼 있다.
이 지역은 주로 북한주민들이긴 하지만 연간 약 1백만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개방되면 국제적인 관광지로 손색이 없다.』 백두산 일대가 김일성 기념물로 넘치고 있는 것도 북한측이개방하는데 유리한 명분이 될 수 있다.특히 금강산이 군사지역에가까워 상당 기간 개방이 불가능한 반면 이곳은 인구마저 희박해관리에도 별 어려움이 없다.따라서 이 지역 개방 만으로도 우선식량문제를 해결할 정도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경제수준이 조금만 개선돼도 인민들의 지지는 높아질 수 있다.이러한 조건에서 김정일체제는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김정일이 군부를 내세워 국가를 통치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당적지도원리에 아무 변함이 없다.』(재미동포) 과연 김정일이 예정대로 국가주석에 취임,현실성 있는 새로운 정책을 선언할지는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그러나 북한이 그 때까지도 「수용소」식 개방수준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강을건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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