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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석칼럼>유권자의 고스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20세기 말 한국 살림의 윤곽을 설명하는데는 게임(도박)이론이 매우 유용한 틀일지 모른다.여행길에 차 안에서 만난,삼천포에서 운수사업을 한다는 중년신사는 끝날 줄 모르는 고스톱 풍조가 너무도 걱정스럽다고 한탄했다.게임이론이란 것은 자신이 결정한 전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 모르는 가운데서 합리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관한 이론이다.고스톱을 너무 크고 잦고 격렬하게 벌이는 것은 걱정할 일이지만 그 덕에 우리 전통 사회에서 너무 부족했던 합리적 의사결정 습 관(게임이론 공부),잃든따든 간에 도박사답게 규칙 존중하기와 치사한 플레이 응징하기,인생에는 도박도 있지만 도박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달관,함께 도박판을 벌이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이런 것을 기르는 데는큰 도움이 되고 있을 것이다.
선거도 하나의 게임이다.입후보자는 자신이 표 따먹기 고스톱을치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그들의 눈에 유권자는 다만 한 장씩의표다.후보자가 치는 선거 고스톱은 그 목적이 분명하고 단순하다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상대를 모두 누르고 나 혼자 당선되는것이 목적이다.그 뿐만 아니다.홍단후보,쭉정이후보,「고도리」후보,광후보,이렇게 본래부터 무슨 패를 갖고 치는지도 분명하다.
정당.지역.학벌.돈.품격(가뭄에 콩 나는 것보다 더 드물지만)등이 그들이 갖고 치는 패다.
유권자 또한 도박사다.아주 열정적인 유권자는 자기가 지지하는후보자와 한 편이 되어 승리만을 위한 게임을 벌인다.소수의 이런 열정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보통 유권자들은 자기의 한 표를어떤 입후보자에게 걸 것인가를 두고 망설이는 도박사다.유권자가치는 고스톱은 목표가 포괄적이고 때론 불분명할 때도 있다.이 이유 때문에 유권자가 후보자 고르는 과정은 고스톱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나는 최근 경남과 부산 지역의 선거 분위기를 기웃거리며 다녔다.부산에서 만난 한 신문기자는 이번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은 많은 부산 사람들이 광주 사람들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점일 것이라고 했다.한마디로 말해서 부산 사람들은 광주 유권자들이 이번 선거 고스톱을 인물 중심으로 칠 것인지,「지역당」중심으로칠 것인지 거기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광주 사람이지역당 중심으로 갈 것이라고 이미 판단을 내린 사람들은 자기도지역당 중심으로 투표하기로 이미 대부분 결정했을 것이라고 했다.광주 사람들이 자기네 지역당 후보만 뽑는데야 이 쪽이라고 별도리가 없다는 것이다.부동표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최후까지 광주 사람들 동향을 지켜보는 침착한 도박사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 라고 한다.
암암리에 지역당 미약(媚藥)을 유권자에게 먹여 표를 모은다는것은 화투로 치면 쭉정이만 모아 그 판을 나보겠다는 후보자,또는 그들 정치 우두머리의 패가망신할 고스톱 전략일 수 있다.광이나 단,이런 늘씬한 패가 없으니 맨발로 뛰어보 자는 수다.
전국이 쭉정이 모으기 판이 되면 사상과 정책으로 선거를 이기겠다는 목표는 사라진다.서로 상대방이 그 판을 나지 못하게 하는 견제 치기로 전락한다.무엇보다 나쁜 것은 당선이 되더라도 유권자들에게서 오래잖아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점이 다.유권자는이 선거가 자기들이 친 고스톱이 아니라 몇몇 정치적 「대형(大兄)」의 암수(暗數)에 걸려 자신은 유권자라기보다 쭉정이 노릇만 했음을 곧 알게 되기 때문이다.한국의 유권자들이 누군가.불행중 다행으로 고스톱 하면 다 한가락 하는 사람들 아닌가.
벌써부터 자기가 쭉정이 신세가 되어 가고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마산 어시장께 「경남복국집」여주인 장씨는 말한다.『표 찍으면 뭐 합니꺼.당선되는 사람만 좋지 우리 좋은 거뭐 있습디꺼.투표하러도 안갈랍니더.』 한국의 민주주의는 꽃핀지불과 8년이 못 되어 심각한 권태기에 이렇게 접어들어 섰다.사상이나 정책에서 다른 뾰족한 고스톱 패를 못잡은 무능한 정치지도자들 탓이 클 것이다.그러나 역시 마산에서 만난 한 자유인 택시기사의 말은 다음과 같다.『저는 그래도 제일 낫다 싶은 인물을 골라서 찍을랍니더.마산 있고 마산 사람은 있어도 마산당 카는 거는 없는 기라예.안그렇습니꺼.제가 찍은 후보자가 당선 안돼도 할 수 없지예.』 말 끝에 그는 쌍욕을 한마디 걸쳤다.
그러나 이 사 람의 말은 한국 민주주의의 권태기를 제압하는 봄풀 같은 희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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