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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세 꺾인 국제유가 ‘자기파괴’의 시작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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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 07면

국제 유가가 뒷걸음질치고 있다. 미국 서부텍사스유(WTI)는 지난달 6일 배럴당 145.29달러까지 치솟은 뒤 한 달도 되지 않아 20달러 정도 내렸다. 1일 유가는 125.10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120달러대로 내려앉은 기름값 전망은

유가 급등세는 한풀 꺾인 듯하다. 2600억 달러 규모의 막대한 자금으로 무장한 국제 원유시장의 투기세력(헤지펀드 등)은 그동안 사 모았던 물량을 풀고 있다. 세계적 금융회사인 바클레이스 캐피털에 따르면 투기세력들은 지난달 21~25일 순매도로 돌아섰다. 지난해 2월 중순 이후 처음이다.

유가가 빠르게 조정받자 시장 분위기도 달라졌다. 한때는 올 연말 유가가 배럴당 200달러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 득세했지만, 지금은 거꾸로 90달러대까지 떨어질 것이란 예상이 힘을 얻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쪽은 70달러 선까지도 떨어질 수 있다고 엄살을 떤다. 마침 금과 구리·곡물 등 다른 원자재 값도 하락하고 있다. 상품 거품의 붕괴가 시작됐다는 진단마저 나온다. 이렇게 “전망이 순식간에 바뀐 것 자체가 과도기라는 증거”라고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에너지 분석가인 에드워드 모스는 말했다. 기름값이 작은 불씨 하나로 다시 튀어 오를 수도 있고, 추세적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여전한 상승 요인
세계 최대 원유 소비국인 미국에서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 둔화로 기름 소비가 줄고 있기는 하다. 2분기 하루 원유 소비량은 2010만 배럴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2070만 배럴에 비해 3% 줄었다. 하지만 투기세력이 유가 상승에 베팅하는 데 빌미를 제공하는 중국 소비는 올해 5%가량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올해 늘어날 세계 원유 소비의 절반이다.

이란 미사일 문제 역시 깔끔하게 해결된 단계가 아니다. 지난 주말 이스라엘은 이란 미사일 기지를 공격할 수 있다고 다시 엄포를 놓았다. 그 여파로 이날 유가가 1달러 이상 올랐다. 멕시코만에서 요즘 빈번하게 발생하는 허리케인도 변수다. 여차하면 텍사스 지역의 원유 채굴시설을 강타해 국제 유가의 단기적 급등을 부채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미 달러 가치 또한 최근 일시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으나 지속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금리인상이 올해 안에는 힘들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달러 가치가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면 각종 펀드들이 헤지 차원에서 원유 매입에 나서 기름값이 다시 상승할 수 있다.
 
자기 파괴 직전
다만 최근의 유가 조정은 국제 원유시장 내의 세력 판도가 서서히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투기세력은 외눈박이처럼 가격 상승 핑계만을 찾았으나 이제 하락 요인에 대해서도 눈을 돌리기 시작한 듯하다. 황소(사자 세력)가 독주하던 국제 원유시장에 곰(팔자 세력)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기름값이 좀 더 오르면 곰들이 공격을 개시해 한바탕 격전을 치르게 될 전망이다. 이들의 싸움에서 판도가 바뀌면 유가는 대세 하락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다.

“곰들은 아직 한 구석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따름이다. 최근 매도는 일시적 조정일 뿐이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원유 소비가 본격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단서가 확인돼야 팔자 세력이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미 케임브리지에너지연구소의 대니얼 예진 회장은 진단했다.

비슷한 현상이 1980년 말에도 있었다. 73년 1차 오일쇼크로 급등한 국제 유가는 일정한 조정을 거쳤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을 이어갔다. 소비자들은 고유가에 적응해 소비를 다시 늘렸다. 79년 이란 회교혁명과 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유가가 다시 치솟았다. 2차 오일쇼크였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 경제는 80년 말 끝내 고유가를 견디지 못하고 극심한 침체에 빠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침체였다.

그때서야 원유 소비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유가가 급등해 극심한 경기침체를 야기하고 끝내 유가 자체가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일컬어 ‘유가의 자기 파괴(Self Destruction)’라고 부른다. 자기 파괴는 유가가 소득수준에 견줘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수준까지 올라야 시작된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마지막 불꽃
현재 미국 등 글로벌 경제 상황과 유가 수준을 종합해 볼 때 국제 유가의 자기 파괴 과정이 본격화했다고 말하기 이르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미국인들의 올 2분기 중 석유 소비가 1년 전보다 3% 감소하는 데 그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인들의 석유 소비 중독 증상은 쉽게 치유되기 힘들다. 전문가들은 미국인들의 소득수준에 비춰 배럴당 120달러대인 유가는 여전히 견딜 만한 수준이라고 설명한다. 현재 미국의 휘발유 값은 갤런당 4달러 선으로, 이를 리터로 환산하면 1달러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다. 배럴당 140달러를 넘었던 유가가 120달러대로 떨어지면서 미국인들의 석유 소비가 다시 고개를 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지난주 미국 경제조사기관인 콘퍼런스보드가 발표한 7월 소비자신뢰지수는 전달(51.0)보다 소폭 오른 51.9로 나타났다. 애초 예상은 하락이었지만 뜻밖에도 올랐다. 콘퍼런스보드는 유가의 일시적 하락이 소비심리를 호전시켰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국제 유가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다시 급등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중동지역의 지정학적 요인이든 아니면 세계 석유 소비의 증가든 어떤 핑계로든 다시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유가가 끝내 배럴당 150달러 선을 넘어서는 시나리오다. 이렇게 되면 미 경제는 집값 급락의 충격과 맞물려 급격히 추락하고, 그 여파로 중국과 인도 경제가 둔화해 세계 원유 소비는 드디어 위축될 수 있다.

다른 시나리오를 제기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20~130달러 선에서 움직이다가 미 집값 추락에 더해 유럽 지역의 주택 가격이 본격적으로 떨어지면 글로벌 경기침체가 본격화하고, 곧바로 국제 유가는 대세 하락 국면에 들어설 것이란 예측이다. 실제 미래의 유가 흐름이 어느 쪽이든 글로벌 경제가 ‘배럴당 200달러 시대’를 맞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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